스포츠조선

'2003년10월2일' 굴레서 벗어난 이정민, 감동을 선사하다

이지현 기자

기사입력 2012-08-31 16:17


29일 인천문학야구장에서 프로야구 SK와 롯데의 경기가 열렸다. 선발로 등판한 롯데 이정민이 힘차게 공을 던지고 있다.
인천=송정헌 기자 songs@sportschosun.com/2012.8.29

2003년 당시 국내 프로야구는 극심한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평일에 펼쳐지는 대부분의 경기장은 한산하기 그지 없었고, 주말에 펼쳐지는 경기도 빈 자리가 훨씬 더 눈에 많이 띄었다. 필자도 당시 광복절에 펼쳐진 한지붕 두가족 라이벌 LG트윈스와 두산베어스의 경기를 직관하러 갔었는데, 90년대를 풍미했던 흥행카드 였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관중석이 썰렁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불황 속에서 홀로 찬란하게 빛나던 흥행카드가 있었다. 바로 홈런 신기록 행진을 펼치면서 일본 프로야구 오사다하루가 세운 아시아 신기록인 시즌 최다홈런(55개) 경신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의 존재였다. 전국 야구장에 때아닌 잠자리채 열풍이 불기도 하였다. 3만석 규모의 관중석이 늘 썰렁함을 면치 못하던 평일의 잠실구장이 이승엽의 홈런포를 건지기 위한 잠자리채의 물결로 넘쳐나기도 하였다.

마침내 이승엽의 홈런 신기록 행진은 경신을 초읽기에 두고 있었으며, 2003년 10월 2일 대구구장으로 모든 야구팬들의 관심이 쏠렸다. 홈팀 삼성 라이온즈와 원정팀 롯데 자이언츠의 맞대결이 펼쳐진 대구구장, 시즌 막바지에 다다랐고, 당시 자이언츠는 압도적인 승률 차이로 꼴찌 자리를 예약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구구장은 만원 관중들로 넘쳐났다. 다름 아닌 이승엽의 홈런 신기록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팬들의 기대대로 이승엽은 2회초 첫 타석에서 좌중간 펜스를 넘기는 홈런을 터뜨리며 마침내 아시아 신기록인 56호 홈런이라는 금자탑을 세우게 된다. 대구구장은 잠시 경기가 중단된 채 폭죽 행진이 펼쳐지면서 축제의 도가니에 빠져 들었다. 당시 마운드에 서 있던 롯데 자이언츠 투수는 당시 프로 2년차였던 이정민이었다. 경기는 6-4로 자이언츠의 승리로 마무리되었고, 이정민은 프로 입단 후 첫 선발승을 따내게 된다. 하지만 모든 관심은 이승엽의 56호 홈런으로 쏠려 있었고, 이정민은 언제나 이승엽의 56호 홈런에 연관지어 검색되는 존재가 되었다.

이후 이정민은 2005시즌 자이언츠의 핵심 불펜요원으로 활약하기도 했지만, 부상과 컨디션 난조 등으로 좀처럼 출장기회를 잡지 못하고 2군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입단 당시 파이어볼로러 기대를 모았지만 들쭉날쭉한 제구력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올 시즌 자이언츠의 선발요원의 한 명인 고원준이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서 2군에 내려간 사이, 이정민은 선발 등판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8월 18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 올 시즌 처음으로 선발 등판한 이정민은 4이닝까지 무실점으로 잘 막다가 5회들어 대거 4점을 허용하며 아쉽게 마운드를 내려간 바 있다.

8월 29일 문학구장에서 펼쳐진 SK와이번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이정민은 올 시즌 두 번째 선발등판 기회를 얻게 되었다. 와이번스와 치열한 2위 자리 다툼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고, 상대 선발투수는 문학구장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용병 마이크 부시였다. 여러모로 이정민에게 부담이 많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막상 경기가 시작되고 나니 예상과는 다르게 경기가 진행되었다.

2회초 자이언츠는 조성환의 중전안타로 선취점을 뽑았고, 4회에는 집중타를 몰아치면서 상대 선발투수 마이크 부시를 조기 강판시키는데 성공한다. 와이번스는 믿었던 선발투수 부시가 예상 밖으로 조기 강판하면서 투수 로테이션 운용에 난항을 겪게 된다. 타선이 초반에 점수를 차곡차곡 얻어 주는 동안 이정민은 묵직한 직구를 앞세워 와이번스 타자들을 요리하였다. 중계방송을 통해 이정민의 투구폼을 지켜보면서 문득 필자가 최근에 겪은 경험이 떠올랐다.

최근에 휴가를 얻은 필자는 후쿠오카 돔을 찾아갔었는데, 주변 쇼핑몰인 호크스 타운 내 오락실에 자리한 배팅케이지 게임을 하게 되었다. 국내에 동네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구 배팅 시설과 차별화된 점이 있었는데, 다름아닌 정면에 자리한 영상에서 투수가 던지는 동작과 동시에 공이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자신의 배팅 선호도에 맞게 투구 속도, 투구 지점까지 조절이 가능한 게임이었다. 필자는 평소에 치던 120km 대의 속도를 선택하고 타석에 들어섰다. 그런데 좀처럼 투수가 던지는 투구폼에 익숙하지 못해서인지 공의 속도는 훨씬 빠르게 느껴졌고, 좀처럼 타이밍을 맞출 수 없었다.



화면에 나오는 투수의 팔동작이 워낙 간결하고 빠르게 진행되고 그와 동시에 공이 나오다보니 타이밍을 맞추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잠시 동안의 경험을 통해 필자는 교훈을 얻었다. 높은 타점에서 찍어내리는 파이어볼러 투수가 팔 동작이 빠르고 던지는 팔이 머리 옆에 가깝게 붙을 수록 타자에게 느껴지는 공의 체감속도는 훨씬 빨라진다는 것이다.

8월 29일 경기에서 자이언츠 이정민은 총 95개의 공을 던졌는데, 그 중에 72개가 직구였다. 거의 직구 하나만으로 승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타자들의 몸쪽 구석구석을 찌르는 묵직한 직구는 와이번스 타선을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와이번스 타자들은 좀처럼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고, 경기가 진행될수록 여유가 생긴 이정민은 체인지업, 포크볼 등으로 타자들의 타이밍을 빼앗으며 아웃카운트를 쌓았다.

8회까지 와이번스 타선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은 이정민은 생애 첫 완봉승을 노렸으나, 9회말 와이번스 임훈과 최정에게 연속 안타를 내주면서 아쉽게 마운드를 내려왔다. 하지만 리그 홈런 1위 와이번스 강타선을 상대로 이정민은 단 1점만 내주었고, 고비 때마다 삼진 6개를 솎아내는 완벽에 가까운 투구를 선보였다.

와이번스와 치열한 2위 경쟁을 펼치고 있는 자이언츠는 이정민의 호투를 발판삼아 귀중한 승리를 거두었고, 마침내 승패마진이 리그 1위 라이온즈에 이어 두 자리수(10)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리고 3위 와이번스와의 승차도 1.5게임차로 벌리면서 2위 경쟁에서 한발 앞서가게 되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정민의 선발승이 2003년 10월 2일 이후 무려 3254일만에 처음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2003년 10월 2일은 이정민이 데뷔 첫 선발승을 거둔 날이었지만, 라이온즈 이승엽의 56호 홈런 신기록이 수립된 날로 팬들에게 각인되었고, 이정민은 본의 아니게 '이승엽의 남자'로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2012년 8월 29일 눈부신 호투를 통해 이정민은 마침내 9년 동안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자랑스런 아빠로서 감격의 눈물을 흘린 이정민은 올 시즌 같은 팀내 2년 선배인 이용훈과 더불어 새로운 인생극장을 펼치고 있다. 두 선수 모두 입단 당시 파이어볼러로 기대를 모았지만 부상으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설움과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야구에 성실하고 진지하게 임한 두 선수는 마침내 30대 중반에 접어든 올 시즌 결실을 맺고 있다. 이용훈은 이제 유먼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원투펀치로 자리 잡았으며, 이정민은 귀중한 선발승을 통해 팬들에게 새롭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킬 수 있게 되었다. 2군에서 배고픈 빵을 먹고 있는 선수들에게, 또한 인기 좀 얻었다고 대충대충 야구에 임하려는 선수들에게 이정민과 이용훈의 활약은 간절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길이 열릴 것이고, 그라운드에서 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 새삼 느끼게 해줄 것이다. <양형진 객원기자, 나루세의 不老句(http://blog.naver.com/yhjmania)>

※객원기자는 이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위해 스포츠조선닷컴이 섭외한 파워블로거입니다. 객원기자의 기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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