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김민선이 세계랭킹 1위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짜릿한 시상대 포즈를 재현해보였다. 허상욱 기자wook@sportschosun.com
'신 빙속여제' 김민선(24·의정부시청) 하면 '반전'이라는 단어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볼 통통, 순둥순둥 반달 눈웃음의 소녀는 얼음판에만 서면 매서운 눈빛의 '악바리 승부사'로 돌변한다. 5년 전 평창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16위,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7위의 소녀는 2022~2023시즌, 국제빙상연맹(ISU) 1~6차 월드컵, 사대륙선수권, 동계유니버시아드 등 나가는 대회마다 금메달을 휩쓸더니 결국 세계랭킹 1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1m68 여리여리한 체구로 1m80 넘는 근육질, 유럽, 북미 에이스들을 따돌리는 모습은 신통방통하다. 10초4대, 다소 느린 스타트를 막판 가공할 코너링으로 이겨내는 '뒷심 스케이팅' 역시 대반전이다. 월드컵 금메달 5개 은메달 2개, 세계랭킹 1위 트로피를 들고 금의환향한 '반전'의 김민선이 올 시즌을 함축한 11가지 키워드에 반달 눈웃음으로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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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스케이팅: "내 인생의 모든 것"
어릴 때 치마를 입은 기억이 별로 없어요. 친구들과 만날 뛰어놀다 넘어지고 혼나고 그랬죠. 아빠가 피겨 말고 쇼트트랙을 권하셨던 이유도 그래서예요. 서래초 4학년때 친구가 피겨스케이팅을 배운다기에 과천빙상장에 따라갔는데 왜 그랬는진 모르겠는데 안전요원 선생님이 제게 대여용 스케이트 말고 날이 긴 스케이트를 가져와서 가르쳐주셨어요. 처음인데도 정말 재미있게 탔고 정식으로 배우게 된 거죠. 2010년 밴쿠버올림픽 직후 한체대에서 열린 쇼트트랙 취미반 대회에서 우승했는데, 기념사진 속에 이승훈, 모태범 오빠가 있어요. 그때만 해도 전 선수가 아니었거든요. 6학년 때 또래보다 늦은 나이에 선수등록을 했고 중학교 때 올림픽 메달을 목표로 정했어요. 이후 스피드스케이팅은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됐죠. 늦게 시작했다고들 하시는데 제가 원하고 스스로 결정했기 때문에 더 재미있게 더 잘할 수 있는 것같아요.
세계랭킹 1위: "상상도 못한 일, 꿈같은 선물!"
새 시즌을 시작할 때 1등을 목표로 하진 않았어요. 지난 시즌 동메달로 마무리한 후 '올 시즌도 메달을 따야겠다'곤 생각했지만 '꼭 1등을 해야겠다'는 아니었어요. 현실적인 성격상 불가능한 목표, 헛된 계획은 잡지 않아요. 월드컵 1차대회 500m 1위, 1000m 2위를 하고 나서 기쁘면서도 너무 놀랐어요. 선수생활 9년 만에 그토록 꿈꿨던 1등, '이렇게 한순간에 될 일이 왜 이렇게 힘들었을까' 살짝 허무한 생각도 들었고요. 2차 월드컵서 다시 1위를 한 후 확신이 섰어요. '반짝' '깜짝'이 아니란 것, 운이 아니라 내 안의 실력이라는 것. 그 확신으로 계속 1등을 할 수 있었어요.
올시즌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세계랭킹 1위 김민선이 따낸 메달들. 허상욱 기자wook@sportschosun.com/2023.03.30/
신 빙속여제: "꿈꿔온 순간"
대회 때 제 기사를 잘 찾아보지 않는데, 부모님은 다 찾아보세요. 나중에 말씀해주셔서 '신 빙속여제'라는 새 별명을 알게 됐죠. 기분 좋은 일, 꿈꿔온 순간이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제2의 이상화'로 불려서 영광스럽기도 했지만, '누군가의 뒤'라는 느낌이 많았죠. '김민선'이란 이름 세 글자로 절 알릴 수 있는 날이 왔다는 게 기쁘고 감사해요.
사진출처=연합뉴스
이상화: "나의 목표"
이 자리에서 꿈꾸고 계속 도전할 수 있는 건 언니를 가까이서 봤기 때문이죠. 언니의 세계 1위도, 마지막 대회도 함께 했어요. 세계 정상을 지키는 게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대단한지 바로 옆에서 봤어요. 언니와 함께 500m 경기에 나설 수 있단 것도 엄청 의지가 됐어요. 언제나 언니를 목이 터져라 응원했죠. 세상의 모든 선수들은 대표팀이 한번 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성장을 해요. 눈앞에서 세계적인 선수의 레이스를 본다는 게 엄청난 공부죠. 이제 제가 가는 길은 언니가 갔던 길을 따라, 도전하는 길이 될 거예요.
스피드스케이팅 김민선이 스포츠조선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허상욱 기자wook@sportschosun.com
36초96: "실력 증명"
캘거리 4차 월드컵에서 찍은 개인 최고기록. 목표했던 36초대 기록을 달성했다는 의미가 커요. 같이 대회를 뛰는 선수 중 36초대 기록 보유 선수는 전세계 5명도 안돼요. 그런 기록에 한발짝 다가섰고, 실력을 입증했다는 의미가 있어요. 물론 더 당겨야죠.
허상욱 기자wook@sportschosun.com
36초36: "깨고 싶은 숫자"
(이)상화언니가 보유한 500m 세계최고기록 36초36은 솔직히 '깨고 싶은 숫자'죠. 올림픽 금메달을 넘어서는 대단한 기록이고, 올림픽 금메달보다 어려워요. 전 누구보다 가까이서 상화언니를 봤잖아요. 2014년 소치올림픽 이후 언니가 그 기록을 왔다갔다할 때도 봤고, 고다이라 나호 선수가 정말 잘 탈 때조차도 그 기록은 결국 깨지 못했어요. 얼마나 대단하고 어려운 기록인지 알아요. 잘 나가는 100%의 링크에서 선수가 100% 준비가 돼 있고 모든 조건과 기운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에 달성할 수 있는 기록이죠.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너무 기쁘고 뿌듯할 거예요
허상욱 기자wook@sportschosun.com
MBTI: "ESTJ(현실적 경영자)"
외향적이고 이성적이고 계획을 잘 세우는 편이에요. 고려대 교양수업 때 '소통과 이해'에서 서로 장·단점을 이야기하는 과제가 있었는데 친구들이 제 단점으로 '이야기는 진짜 잘 들어주는데 공감을 잘하는 것 같진 않다'고 했어요. 좀 충격… 제가 '많이 힘들었겠다' 이런 말을 잘 안하거든요. 이후로 공감 능력을 키우려고 노력은 하는데….(웃음) 현실적인 편이어서 어떤 상황에서든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대안을 찾으려 노력하는 편이에요. 어영부영 의미 없이 시간 끄는 건 싫어요. 어려서부터 나서서 딱 정리하는 걸 좋아해요.
출처=김민선SNS
모카: "최애 반려견"
너~무 귀여워요. 작년 여름 진천선수촌 근처 카페에서 임시보호중이던 강아지를 입양했죠. '모카'는 제가 주보호자란 걸 알아서 절 제일 좋아하고, 특히 제 침대를 정말 좋아해요. 시즌 중간, 대회 하고 집에 오면 모카랑 멍때리면서 머리를 비울 수 있는 시간이 제일 행복해요. '모카'와 산책하는 시간이 '힐링'이에요. '모카'가 온 이후 모든 일이 잘 풀려서 많은 분들이 '복덩이'라고 하시더라고요.
2018 평창: "가장 큰 발전을 위한 깨달음의 시간"
첫 올림픽에 대한 꿈이 컸어요. 제가 원하는 기록이 있었는데 개막 열흘전 허리 부상으로 최고도, 최선도 아무것도 아닌 결과(16위)로 끝나버렸죠. 힘들었지만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어요. 부상이 사고가 아니라, 몸 풀 때 일상적 동작에서 과부하가 왔다는 걸 알게 됐죠. 잘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몸이 보내는 신호를 모른 척한 거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작은 신호도 무시해선 안된다는 선수로서 가장 소중한 걸 배웠어요.
출처=김민선 SNS
2022 베이징: "할 수 있다는 가능성"
베이징올림픽은 100%가 아니었어요. 부상 없는 선수들은 3~4년을 준비하지만 전 훈련시간이 절대 부족했죠. 최선을 다했고, 결과(7위)에도 만족했어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고, 올림픽 후 파이널 대회를 동메달로 마무리했죠. 금메달만큼 기뻤어요. 에릭 젠슨, 브리타니 보 등 존경하는 스케이터들과 첫 시상대에 올랐고, 조카뻘인 절 진심으로 축하해줬어요. 올 시즌 잘 할 수 있는 힘이 됐죠.
허상욱 기자wook@sportschosun.com
2026 밀라노: "최고의 순간"
앞으로 3년이 정말 중요해요. 이번 시즌을 통해 올림픽 메달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가까이 왔다고 느껴졌어요. 부상으로 정말 힘들었을 땐 '올림픽 메달이 가능할까, 이러다 세계 십 몇 위 선수로 은퇴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이번 시즌을 통해 '결코 그렇게 끝나진 않겠다. 할 수 있겠다'는 분명한 확신이 생겼죠. 세 번째 올림픽, 밀라노가 '약속의 땅'이 되길. 인생 최고의 순간이 3년 후 꼭 찾아올 거라 믿어요.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