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패럴림픽 통산 메달이 단 1개뿐이었다는 개최국 중국이 안방서 금메달 18개, 종합순위 1위를 찍고 환호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4년 전 뜨거웠던 평창이 '오버랩'됐다. '노르딕 철인' 신의현의 동계패럴림픽 사상 첫 금메달, 파라아이스하키의 사상 첫 동메달, 그 겨울의 끝 평창은 축제였다. 코로나와 대선, 그리고 전쟁…, 4년 전 그날과는 사뭇 다른 온도에서 '평창의 영웅'들은 4년 전 그날과 똑같이 베이징의 빙판을 지치고 장자커우의 설원을 내달렸다.
8일간 6종목에서 무려 57.5㎞를 달린 '42세 디펜딩챔피언' 신의현(창성건설)은 베이징서 2연패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 울컥울컥하는 목소리엔 필설로 다 못할 마음고생이 읽혔다. 장자커우의 1600m 고지대, 강풍 속 '2대회 연속 완주'는 위대한 기록이라는 위로나 '졌잘싸'는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신의현은 말했다. "기자님, 선수는유, 그런 거 없어유. 다 핑계쥬. 어떤 상황서도 무조건 해내야쥬."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매경기 쉼없이 달렸던 '직진남'이 이곳에서 남긴 마지막 한마디는 이랬다. "우린 대한민국이잖아요. 대한민국 국가대표는 이렇게 쓰러지지 않는다고, 꼭 다시 일어설 거라고 써주세요."
[패럴림픽] 한민수호 2회 연속 메달 도전 실패<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파라아이스하키 레전드 사령탑' 한민수(52)는 주장으로 뛰었던 평창패럴림픽 동메달 후 눈물을 펑펑 쏟아 '울보캡틴'으로 회자됐다. 하지만 중국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0대4로 패한 후 한 감독은 울지 않았다. 냉정하게 "평창 이후 한국 파라아이스하키는 성장하지 못했다"고 짚었다. "국내 유일 실업팀 강원도청이 생기면서 평창에서 동메달이라는 성적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실업팀 하나로는 국내서 경쟁이 되지 않는다. 정체된 느낌이 있다"고 했다. 지난 4년간 틈날 때마다 평창기념재단 파라아이스하키 아카데미에서 어린 선수들을 발굴하고 키워왔던 그는 "내가 앞으로 해야할 일을 더 확실하게 알았다"고 했다.
부상당한 정승환<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정승환 사진제공=베이징패럴림픽공동취재단
'빙판메시' 정승환(36·강원도청)은 중국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1998년생 중국 영건' 선이펑의 거친 반칙에 쓰러졌다. 보디체킹 중 날선 픽으로 정승환의 목 부위를 찔렀다. '빙판메시'는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전념하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첼시맨' 은 골로 캉테의 명언을 가슴에 새겼다. 두돌 된 아들에게 동메달을 보여주겠다는 일념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경기 후 정승환은 중국의 어린 선수를 탓하지 않았다. "이 정도쯤은 언제든 참고 뛸 수 있다. 다친 것보다 진 것이 더 아프다."
이제혁이 7일 중국 장자커우 겐팅 스노우파크에서 열린 2022년 베이징동계올림픽 스노보드 크로스 남자 하지장애(SB-LL2) 부문 준준결승에서 혼신의 역주를 펼치고 있다. 사진제공=대한장애인체육회
도쿄서 그러했듯 베이징의 MZ세대 역시 패기만만했다. 비장애인선수 출신 스노보더 이제혁(25)은 첫 패럴림픽에서 메달을 노렸다. 무려 3개의 세리머니를 준비했었다. 메달을 놓친 후 2개의 세리머니를 귀띔하더니 '나머지 하나는 4년 후 밀라노에서 메달을 따고 보여주겠노라' 약속했다.
사진제공=대한장애인체육회
알파인스키 시각장애 부문에 출전한 '최연소' 최사라(19·서울시장애인체육회)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2년 가까이 동고동락한 가이드러너 김유성이 출국을 앞두고 코로나에 걸렸지만 경기를 앞두고 극적으로 합류했다. 패럴림픽 데뷔전을 무사히 마친 최사라가 가이드러너와 따뜻하게 포옹하는 장면은 아름다웠다. 올해 한체대에 진학한 '22학번 새내기' 패럴림피언은 수줍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목표는 패럴림픽 메달이에요."
파라아이스하키대표팀 1996년생 막내 이재웅-최시우, 촬영은 이준용 선수.
한민수호의 '1996년생 막내' 최시우는 동메달전 직후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링크에서 폭풍선방을 펼친 '동갑내기 친구' 골리 이재웅과 '어깨동무 인증샷'을 남겼다. "4년에 한번 돌아오는 추억이니까"라며 웃었다. "평창 동메달 땐 내가 선발 출전하지 못해 사진을 못찍었다. 친구 재웅이와 4년마다 기록을 남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앞으로 몇 번의 패럴림픽에 나서게 될까. 이 청춘들의 길은 대한민국 파라아이스하키의 미래다.
사진제공=대한장애인체육회
이번 대회 한국선수단에서 여성선수는 단 2명이었다. 4년 전 평창에선 36명의 선수단 중 여성선수는 이도연, 고 서보라미(이상 노르딕스키), 방민자(휠체어컬링), 양재림(알파인스키) 등 4명이었다. '깜찍한 막내' 최사라와 휠체어컬링의 '강심장 리드' 백혜진(39·의정부 롤링스톤)을 보며 지난해 세상을 떠난 고 서보라미를 떠올렸다. 철인의 종목, 크로스컨트리 스키에서 늘 수국처럼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녀의 빈자리를 메울 후배들이 나오길 기대한다. 이번 베이징동계패럴림픽에 참가한 46개국 560여 명의 선수 중 여성은 138명, 역대 패럴림픽 최다였다.
대한장애인체육회는 이번 대회 유독 스포츠과학의 성과를 강조했다. 파라아이스하키 대표팀은 처음으로 전력분석관 2명을 지원받았다. 한 감독 역시 2연속 4강행의 비결로 실시간 영상 분석을 꼽으며 지원에 무한 감사를 표했다. 비장애인, 프로스포츠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일상인 일들이 장애인체육에선 여전히 특별한 일이다. '올림픽의 완성' 패럴림픽에서 맞춤형 스포츠과학도, TV 생중계도 당연한 일상이 되길 바란다.
또 한번의 패럴림픽이 지나간다. 어쩌면 '노메달' 한 단어로 기록될 베이징에서 31명 선수들의 피, 땀, 눈물을 떠올린다. 도쿄에서, 베이징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아쉽다"였다. 4년 후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에선 이 모든 아쉬움을 떨쳐내고 활짝 웃을 수 있기를. 베이징(중국)=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