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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환 손에 꼭 쥔 쪽지'청문회 잘 마칠수있게...'

전영지 기자

기사입력 2015-03-26 07:49



'청문회 잘 마칠 수 있게 도와주세요.'

23일 오전 10시30분(현지시각) 스위스 로잔 팰리스 호텔, 국제수영연맹(FINA) 도핑위원회 청문회를 앞둔 대기실, 박태환(26)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긴장했다. 올림픽 금메달을 다투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긴장감이었다. 수영선수로서의 운명이 결정되는 일생일대의 순간이었다. 참관인으로 현장을 지킨 정일청 대한수영연맹 전무가 박태환을 바라봤다. "태환아, 자신감 있게 해. 누구나 실수를 하고, 누구에게나 시련은 닥치잖아. 운명은 이미 결정돼 있어. 이번에 신은 네 편일 거야." 격려의 말을 건네던 정 전무의 눈에 박태환이 손에 꼭 쥔 메모가 들어왔다. 연필로 꾹꾹 눌러쓴 메모였다.

'청문회 잘 마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박태환은 무교다. 스물여섯 인생에서 가장 간절했던 순간, 박태환은 우주를 지배하는 세상의 모든 신들에게 절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정 전무는 "나도 태환이보다 한살 많은 딸이 있다. 부모의 마음이었다. 이놈이 난생 처음 서는 이런 자리에서 얼마나 긴장됐겠나. 너무 안쓰러웠다"고 했다. "네 뒤엔 우리가 있다. 걱정 마라. 여기 온 10명 모두 네 편이다"라며 박태환의 외로운 어깨를 두드렸다.

청문회장에는 정 전무와 함께 이기흥 대한수영연맹회장, 김지영 대한체육회 국제위원장, 김동권 연맹 사무국장, 담당 변호사, 박태환 소속사 팀지엠피의 박인미 마케팅실장과 매니저, 통역 등 10명이 함께 했다. 박태환을 '병풍'처럼 지켰다. 로버트 폭스 청문위원장은 "FINA 청문회에 이렇게 많은 참관인이 온 것은 처음"이라며 웃었다. 일일이 이름과 직책을 확인했다. 오전 10시30분부터 시작된 청문회는 점심 시간을 훌쩍 넘겨 오후 2시30분까지 계속됐다. 4시간여의 '마라톤' 청문회, 답변하는 이, 지켜보는 이 모두 피가 바짝 말랐다.

이기흥 대한수영연맹 회장은 청문회 말미에 발언권을 얻었다. 밤새 달달 외운 영문 스피치로 청문위원들에게 간절히 호소했다. 한국 수영은 물론 세계 수영계에서의 박태환의 공로, 선수로서뿐 아니라 인간 박태환의 가치를 이야기했다. 수영연맹에서 14년간 일한 '터줏대감' 정 전무는 청문회팀 중 가장 먼저 로잔에 입성해, 되든 안되든 마주치는 FINA 관계자들마다 진심을 다해 '기회'를 읍소했다. "지난 10년간 이 선수가 세계 수영계와 FINA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달라. 무죄 석방해달라는 것도 아니다. 선수 본인이 잘못을 인정하고 있다. 신체조건도 불리한 한국의 한 선수가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쟁하며 이룬 업적은 알아달라"고 했다. "당신들이 믿을지는 모르지만, 선수는 정말 모르고 맞았다. 이 위대한 선수가 한낱 '약쟁이'로 끝나지 않게 해달라. 메달을 따고 안따고는 중요치 않다. 적어도 한번은 만회할 기회를 줘야 하지않나."

지난 10년간 선수와 연맹의 관계는 냉온탕을 오갔다. 한때 '앙숙'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선수생명이 걸린, 최대 위기 앞에 선수와 연맹은 하나가 됐다.

4시간의 마라톤 회의 후 정 전무는 FINA관계자로부터 직접 "미스터 박, 에이틴 먼쓰(Mr. Park. 18months)"라는 말을 전해들었다. 기간은 도핑 양성반응이 적발된 9월3일부터 내년 3월 6일까지다. 내년 8월 리우올림픽에서 명예회복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25일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한 정 전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100% 아니, 150%를 했다"고 말했다.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른 후 안팎에서 위기에 몰린 '품안의 자식'을 외면하지 않았다. 정 전무는 "부모가 자식이 맘에 안든다고 버릴 수 있나. 예쁠 때도 자식이지만, 미울 때도 자식이다. 속상해도 끝까지 책임지고, 데려가야 하는 것이 부모"라며 웃었다. 이 회장 역시 귀국 인터뷰를 통해 "처음으로 경험한 일인만큼 선수가 많이 당혹스럽고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더 큰' 태환이를 만들어줄 것"이라고 했다. 18개월 자격정지 징계의 배경에 대해 "FINA가 박태환이 한국과 세계수영계의 발전에 기여해온 부분을 인정하고 평가한 것으로 본다"고 답했다.


이 회장은 도핑에 연루된 선수의 3년 자격정지를 명시한 대한체육회 선수 선발 규정과 관련해서는 "지금 논의할 사항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해당 규정이 생긴 것이 지난해 7월이다. 지금 이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법의 안정성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것은 태환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 꿈나무 선수, 사회에 대한 봉사, 시련을 극복해 나가기 위한 노력으로 만인의 표상이 되고, 누가 봐도 처절한 노력으로 극복해 내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 과정 이후에야 논의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철저한 자기 성찰과 뼈를 깎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태환이를 리우올림픽에 보내는 것과 법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 중 어느것이 더 공익에 부합하는지 그때 가면 논의의 장이 열릴 것이다. 지금 상황에선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준 데 대해 철저한 자기성찰, 합당한 노력을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재차 강조했다.

박태환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이 회장은 "박태환이 직접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들에게 모든 것을 소상히 말씀드릴 것이다. 팬과 국민들에게 진정으로 사과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공항=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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