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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장미란(30·고양시청)은 '장미란 재단'을 공식 출범시켰다. 장미란 재단을 통해 스포츠선수(헤드멘토)-재능기부자(서브 멘토)로 구성된 멘토그룹과 스포츠 꿈나무들의 만남의 장을 열겠다는 취지였다. 장미란은 "올림픽 비인기종목을 돕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 재단은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첫 단추다"라며 감격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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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강원도 원주에서 장호철씨와 이현자씨의 1남2녀 중 맏딸로 태어난 장미란은 출생 당시 체중이 5.9㎏이었다. 중학교 3학년까지 피아노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소녀였다. 하지만 유난히 큰 체격 탓에 또래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의기소침해졌다. 이로 인해 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이 떨어지자 역도인 출신인 아버지와 학교 체육선생님은 그녀에게 바벨을 권했다. 당시 장미란은 "바벨을 잡기가 죽기보다 싫었다"고 했다. 그러나 바벨을 잡은 지 10일 만에 떠 밀려 출전한 강원도 중학생 대회에서 덜컥 우승을 차지했다.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천부적으로 힘이 좋았고 바벨을 드는 감각도 뛰어나 역도를 시작한지 4년 만인 태극마크를 달았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역도 최중량급(75㎏이상급)에서 은메달을 차지하며 세계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뒤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여성'이 됐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세계선수권 4연패(2008년 제외)를 달성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4년 전의 한을 풀었다. 장미란은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여자 최중량급 인상(140㎏) 용상(187㎏) 합계(326㎏)에서 세계기록을 작성하는 등 적수가 없는 강자로 군림했다.
은퇴 기자회견장에 선 그녀는 중학교 3학년 시절을 떠올렸다. "나는 중학교 3학년까지 꿈이 없었다. 그리고 꿈 없던 여학생은 역도를 통해 국민의 사랑을 받는 선수가 됐다." 그리고 자신처럼 미래를 고민하고 있을 청소년에게 메시지를 던졌다. "덩치가 있고 외적으로 자신이 없는 친구들은 어디를 가도 위축된다. 나도 그랬기에 그 마음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이 나를 보면서 힘을 얻는다고 얘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다. 요즘 청소년들이 미래에 대해 많이 고민을 하는데 누구든 잘 할 수 있는 것이 꼭 한가지씩 있다. 내가 역도를 통해 길을 찾았던 것 처럼 주변 소리에 귀기울이는게 좋을 것 같다." 힘들었던 중학교 3학년생 시절을 떠 올리며 장미란은 재단 설립을 꿈꿨고 세계적인 스타가 된 뒤 그 꿈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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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 후유증은 생갭다 컸다. 허리 목 팔목 등 다발성 부상에 시달렸다. 2009년 세계선수권자가 된 뒤로 2010년부터 기록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장미란은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4위에 그치며 마지막 올림픽을 아쉽게 마감했다. 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 등 세계 무대에서 금메달을 모조리 휩쓴 '그랜드슬래머' 장미란의 마지막 대회는 전국체전이었다. 그녀는 10회 연속 3관왕의 위업을 달성하며 바벨과 이별을 고했다.
"누구보다 행복한 선수 생활을 했다." 15년간 정들었던 바벨을 내려 놓은 장미란은 은퇴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보였다. 바벨의 무게만큼 어깨를 짓눌렀던 부담감에서 벗어나 몸은 홀가분했지만 은퇴가 현실로 다가오자 참았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친 그녀는 "울지 말고 쿨하게 웃으면서 기자회견해야겠다 생각했는데 막상 자리에 서니 눈물이 난다. 선수로서 마지막 인사"라고 입을 열었다. "선수라면 누구나 은퇴시점이 오고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나도 런던올림픽과 전국체전을 마치며 은퇴를 생각하게 됐다. 3개월간 많은 고민을 했다. 서운함과 아쉬움이 남아 선수생활 연장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마음만 최선을 다한다고 되는게 아니다. 몸도 최선을 다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은퇴를 결심하게됐다."
눈물이 웃음으로 바뀌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은퇴는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다시 담담한 모습으로 마음을 추스렸다. 은퇴 이후 '인생 제2막'을 설명할 때는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용인대 박사과정을 열심히 할 것이다. 또 재단을 통한 사회 공헌 활동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인생 제2막'의 중심에는 장미란 재단이 있었다. 지난해 11월, 말레이시아로 재단 '힐링 캠프'를 다녀온 그녀는 각 종목 꿈나무 멘티들과 4박 6일간 우정을 나눴다. 힘들었던 여정이지만 끝난 뒤 찾아오는 보람에 장미란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지울 수 있었다. 그녀는 "런던올림픽에서 내가 평상 받아도 다 못받았을 사랑을 받았다. 역도 선수가 되어 많은 것을 누렸다. 이제 재단을 통해 재능을 기부하고자 한다. 꿈나무들을 비롯해 일반 학생들에게도 신체 건강의 중요성을 알리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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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란은 은퇴 기자회견에서 그동안 숨겨왔던 새로운 꿈을 공개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 위원이다. 그녀가 IOC 선수위원을 꿈꾼 것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문대성이 IOC 선수위원으로 선출된 것을 보고난 직후다. 장미란은 "문대성 선수 위원께서 활동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IOC 선수위원을 꿈꾸게 된 선수들이 많아졌다. 나도 그 중에 한 명"이라고 말했다.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선수위원에 선출된 문 위원의 임기는 2016년까지다. 장미란은 "선수 위원은 하고 싶다고 되는게 아니다. 자격 요건을 갖추고 준비해야 한다. 남은 기간동안 열심히 준비해서 선수 위원에 도전하고 싶다"며 포부를 밝혔다. 'IOC 선수 위원' 장미란의 꿈도 재단과 함께 크고 있었다. 그녀는 "선수로 혼자 하는 것보다 IOC 위원으로 (재단) 활동을 한다면 목표한 꿈을 향해 가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스포츠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자리니 재단이 추구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장에는 장미란의 가족이 모두 참석해 그의 새 출발을 축하해줬다. 아버지 장호철씨는 함께 눈물을 흘리며 은퇴의 아쉬움을, 어머니 이현자씨는 환한 웃음으로 제2의 인생을 함께 반겨줬다. 장미란은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가족의 도움이 컸다. 운동에만 집중하고 싶은게 선수인데 내가 하지 못하는 부분을 아버지가 잘 해주셨다. 정신적인 부분은 어머니의 도움이 컸다. 삼박자가 잘 맞아서 선수생활을 오래 할 수있었다. 이제는 내가 가족을 도울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하성룡 기자 jackiech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