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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선수]'장애인노르딕스키'이정민"쉬운길보다 힘든길을..."

전영지 기자

기사입력 2015-12-16 18:35



공부하는 선수
장애인 노르딕스키 이정민
연세대=최문영 기자 deer@sportschosun.com /2015.12.15/

공부하는 선수
장애인 노르딕스키 이정민
연세대=최문영 기자 deer@sportschosun.com /2015.12.15/

'장애인 노르딕스키 선수' 이정민(31)을 만난 것은 지난 8월 창성건설의 노르딕스키팀 창단식에서다. 민간기업이 장애인 스키팀을 처음으로 창단하는 뜻깊은 자리에서, 또렷하게 목표를 밝히고 조리있게 생각을 표현하는 똘망똘망한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연세대 국제대학원에서 공부를 병행하고 있다고 했다. 이정민을 다시 만난 건 지난 16일 한겨울 연세대 신촌 캠퍼스에서다. 14일 러시아전훈을 마치고 귀국했다는 그는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기말시험 준비에 한창이었다.


발목이 안움직일 뿐, 다르지 않다

이날 이정민은 연세대 새천년관 국제대학원 교수실에서 '나홀로' 기말고사에 임했다. '영어' 프리젠테이션이었다. 노르딕스키팀이 창단된 후, 전훈 등로 인해 빠진 지난 학기 동안 스포츠 현장에서의 노력을 설명해야 했다. 유창한 영어로 지난 1년간 장애인 노르딕스키 국가대표로 활약해온 경험, 소치패럴림픽 등 국제 현장에서 스태프로 참여해 통역 등의 인턴십 경험을 쌓은 경험, 국제대학원 졸업 이후 평창패럴림픽의 꿈, 국제 행정가의 도전과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았다. 젊은 장애인선수의 씩씩한 프리젠테이션이 끝나자 지도교수는 "굿잡, 굿럭(Good job! Good luck!)"이라는 말로 격려했다.

대전 한밭초등학교 2학년 무렵 '길랭바레증후군'이라는 낯선 병마가 찾아들었다. 자전거를 들고 계단턱을 오르다 주저앉았다. 이정민은 자신의 병을 "바이러스로 인해 운동신경이 마비되는 희귀병"이라고 담담하게 설명했다. 처음엔 전신을 꼼짝할 수 없었다. 1년반의 끈질긴 치료 끝에 무릎 바로 아래서 마비는 멈췄지만, 양쪽 발목 마비는 평생 장애로 남았다.

그러나 이정민은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축구도 농구도 빠지지 않았다. 뒤로 빼거나 '열외'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어렸을 때는 왜 안되는지 이해를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운동에 재능이 없네' 정도로 생각했다. 발목이 안움직이니 당연한 건데,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다"며 웃었다. 비관하거나, 고민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장애 정도가 경미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냥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인드가 어렸을 때부터 여기까지 나를 지탱해온 힘"이라고 했다. "누구나 무엇이든 하다보면 극복하게 되고, 잘하게 된다. 비장애인도, 장애인도 계속 열심히 하다보면 어느 수준에는 다 이르게 된다."


'연봉 5000만원' 금융회사 대신 택한 '선수'의 길


고2가 되던 2003년 부모님의 권유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이정민은 축구에 몰입했다. "무조건 1인 1스포츠, 방과후 특별활동으로, 체육은 누구나 무조건 해야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직후여서, 나는 축구에 미쳐 있었다." 비장애인 미국 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축구를 했다. "뚱뚱했고, 발목도 불편했지만, 골키퍼 포지션을 맡겠다고 하니 모두 오케이했다. 드리블은 못하지만 점프는 할 수 있다. 선방도 꽤 했다."

미시간대학교 광고학과를 졸업한 후 평범한 직장인으로도 살 뻔했다. 2008~2009년 미국 조지아의 기아자동차 협력업체 총무인사과에서 일하다. 귀국해 2013년 초까지 영국계 금융회사에서 외국환 중계일을 했다. 그러나 활발한 성격의 이정민은 '보다 멋지고 신나는' 길을 꿈꿨다. 2013년 1월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조정 특집'을 보다 '저거다!' 했다. "앉아서 하는 운동이니 내게 특화된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살이 되던 해였다. 터닝포인트도 필요했다."

잘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조정선수의 길에 들어섰다. 2013년 충주세계조정선수권에 출전했다. 2014년 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에도 나섰다. 혼성종목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공부도 함께 시작했다. 국가대표 공식 훈련일수가 90일에 불과한 상황, 남은 시간을 대학원 공부와 '셀프 훈련'으로 채웠다. 연세대 국제대학원 국제협력 전공, 그러나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강의실에선 훈련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 힘들었고, 훈련 현장에서는 국제협력 공부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 힘들었다. "전공, 실무적인 부분은 운동이고 공부는 국제협력, 관계에 대한 것이니,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다." 혹독한 훈련속에 지쳐가던 상황, 인천아시안게임을 앞두고는 대학원을 휴학했다. "목표가 있다고 해서 모든 일이 내 뜻대로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선수의 삶은 생각처럼 멋지지 않았다.






"편한 길보다는 힘든 길을 택해야 한다"

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 직후 이정민은 새 도전을 시작했다. 동계종목 중 조정종목과 가장 비슷한 크로스컨트리를 택했고, 첫출전한 동계체전에서 금메달2개, 은메달1개를 따냈다. 8월, 창성건설이 노르딕스키팀을 만들면서 창단 멤버로 특채됐다. 평창 전지훈련이 시작되면서 이정민은 다시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 한학기,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모든 수업을 화요일로 몰았다. 녹초가 된 몸으로 평창에서 서울까지 차를 몰았다. 수업전날 학교앞 3만원짜리 모텔을 잡거나, 새벽 4시반부터 등굣길에 올랐다.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9시간 '연강'을 들었다. "그렇게 해서 내년 3월에 드디어 학위가 나온다"며 싱긋 웃었다.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는 현실에 대해 "짜증이 났다. 둘다 놓치는 것같은 느낌도 들었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그래도 정말 열심히 산 건 같다. 그것에 대한 자부심은 있다"고 했다. 치열한 삶속에 뜻밖의 기회도 찾아왔다. 전용관 연세대 스포츠레저학과 교수의 추천으로 소치패럴림픽 황연대극복상 위원회 진행요원으로 참가했다. 소치패럴림픽을 스태프로 경험했던 그가, 4년후인 2018년 평창에선 선수로서 메달을 꿈꾸게 됐다. "평창에서 좋은 성적을 내서 메달을 따고 싶다. 내 경험과 지식을 활용해 아시아국가들이 국제 스포츠계에서 발언권을 높이고, 장애인스포츠뿐 아니라 대한민국 스포츠문화가 발전하고 인식이 변화하는데 기여하고 싶다."

그는 장애인선수 스스로의 노력을 강조했다. "우리의 발언권을 높이기 위해선 스스로 더 노력해야 한다. 앉아서 떡고물을 기다려서는 안된다. 많은 장애인선수들이 공부에 큰 관심이 없다. 특별전형으로 특수교육, 사회복지과를 가는데 만족한다. 장애인선수들도 서울대에 도전하고, 다양한 학과에 도전해야 한다. 특별전형만 기다려서는 전체 사회에서 경쟁력이 떨어진다. 편한 길보다는 더 힘든 길을 택해야 한다"고 했다. "정말 힘들었지만 국제대학원 학위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도 이때문"이라고 말했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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