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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축구 세미나가 있다는데 한번 가볼래요?"라는 제안에 "좋아요"하며 흔쾌히 응했다. 지난 2일 서울 신문로 아산정책연구원 강당, 대한민국 여자축구 에이스 전가을은 맨 뒷자리에 앉아 귀를 쫑긋 세우고 이용수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 윤영길 한체대 교수 등 패널들의 토론을 경청했다. 세미나가 끝난 후 전가을이 말했다. "와, 정말 감동이네요. 저희를 위해, 여자축구를 위해 이렇게 많은 분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토론해주신다는 자체가 정말 감사해요. 우리가 '더 열심히', '더 잘'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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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캐나다여자월드컵 출정식, "대한민국에서 여자축구선수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며 눈물을 왈칵 쏟았었다. '악으로 깡으로' 가시밭길을 헤쳐나가며 2009년 베오그라드유니버시아드 첫 우승, 캐나다월드컵 첫 16강의 꿈을 이뤘다. "후배들은 우리처럼 힘들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은 좋은 선배가 되기 위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전가을은 수원시시설관리공단(FMC) 시절인 2009년 공부를 시작했다. 2년제 여주대를 졸업한 후 명지대에서 학점을 채웠다. 지난해 명지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공부를 결심한 데는 책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빠가 제 멘토세요. '너는 대학교도 다녀야 하고, 공부도 해야해'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심어주셨어요." 초등학교 4~5학년까지 탁구선수로 뛰었던 전가을은 공부를 좋아하거나 썩 잘하진 못했지만 궁금한 것을 보면 푹 빠져드는 호기심 많은 어린이였다. "사회과부도, 지구본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냥 골똘히 들여다보곤 했어요. 지금도 사회, 역사를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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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공부를 시작하던 해, 전가을은 독했다. 수원 시절 5~6시에 훈련을 마치면 명지대 용인 캠퍼스로 달려갔다. 6시반에 시작하는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저녁을 거르기가 일쑤였다. 밤 9시30분 수업이 끝나고 숙소에 돌아오면 10시 반, 씻고 자기 바빴지만 힘든 줄 몰랐다고 했다. 시험기간이면 2~3시간 쪽잠을 자는 날도 있었다. "숙소에서 동료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혼자 불 켜놓고 시험공부를 했다"고 털어놨다. "축구선수는 회복이 중요하고 잠도 충분히 자야 한다. '왜 저래'하는 시선도 있었다. 그 시간들이 선수로서 무리였을 수도, 유난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냥 했다. 값진 시간이었다."
공부와 운동을 병행한 그해, 전가을의 성적은 가장 화려했다. 팀이 WK리그에서 우승했고 유니버시아드 금메달도 땄다. 그러나 이후 대학원 진학 결정까지 2년이 흘러갔다. "축구만 전념해도 힘든데 공부와 병행하면 힘들 것같았다"고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결국은 핑계였다. 나도 남들과 똑같았다.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삶을 못 이겨낸 것"이라고 냉정하게 돌아봤다. '대학원 안가니' '뭐하냐, 벌써 졸업했겠다' 명지대 교수님들과 가족의 권유가 이어졌다. 여자축구 현역 선수 가운데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는 선수는 드물다. 애정어린 '잔소리'에 힘입어 전가을은 지난해 다시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다.
체육학개론, 스포츠 영양학, 미디어마케팅, 스포츠코칭 등 다양한 과목을 들었다. 체육학개론 노트, 또박또박 눌러쓴 글씨가 그녀처럼 야무졌다. '프로의식'에 별표를 쳤다. '열정의 중심에 서라' '나의 장점을 살리자' '노력은 한계가 없다'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라는 문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강의실에서 배운 지식이 그라운드에서 도움이 됐고 그라운드에서의 경험이 강의실 공부에 도움이 됐다. '시너지'였다. 전가을은 "축구 밖 세상을 보게 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폭넓게 사고하게 되고 호기심도 생긴다. 심리적인 부분, 영양학적인 부분은 오히려 운동하는데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공부를 망설이는 동료들을 향해 전가을은 "처음에는 무조건 공부를 권했지만 이젠는 내 생각을 동료, 후배들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다. 장사를 할 수도 있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 다만 나와 같은 공부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고민과 경험을 기꺼이 나누고 싶다"고 했다.
전가을은 여자축구의 길을 여는 선수다. 대학원도, 미국 여자축구리그도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향한 '용감한' 도전이자 책임감이었다. 꿈을 묻는 질문에 "알면 알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하고 싶은 일이 많아진다. 꿈을 한정짓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여자축구가 필요로 하는 곳 어디든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지도자, 축구행정가 등 폭넓은 분야에 폭넓은 관심을 드러냈다. 변변한 에이전트도 없는 열악한 현실 속에, 오롯한 실력 하나로 미국행 꿈을 이루게 됐다. "돈도 많이 벌고 실력을 갖춰 내가 후배들을 아무 조건 없이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했다.
"여자축구의 길을 열어가는 선수가 되고 싶다. (지)소연이도 유럽에서 잘하고 있다. 나도 미국에서 대한민국 여자축구선수의 힘을 보여주고 싶다"는 꿈을 밝혔다. 전가을은 내년 4월 미국 여자축구리그(NWSL)에 한국선수로는 처음 도전한다. 새 도전을 앞두고 영어회화 개인과외도 시작했다. "박지성 선수를 가르쳤던 영어강사분하고 얘기중이다. 열심히 배워보겠다"며 눈을 빛냈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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