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전남-강릉시청 사상최장 28명 승부차기 리플레이

전영지 기자

기사입력 2013-05-09 19:22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2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1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이상의 '오감도'처럼 막다른 그라운드, 14인의 선수가 골대 앞에 섰다. 제1의 선수부터 제14의 선수까지 무시무시한 슈팅전쟁이 시작됐다.

8일 밤 전남 광양전용구장에서 펼쳐진 하나은행 FA컵 32강 전남 드래곤즈과 강릉시청은 전후반 90분, 연장 전후반 30분까지 120분간 사투를 벌였다. 0대0, 끝내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하석주 전남 감독은 주말 전북전을 앞두고 베스트 멤버를 아꼈다. 최전방부터 골키퍼까지 완전히 새로운 라인업이었다. 그라운드에 목마른 선수들은 사력을 다했지만, 손발이 맞지 않았다. 반면 내셔널리그 선두 강릉시청의 조직력은 단단했다. 경기 내내 고전했다.

운명의 승부차기가 시작됐다. 김병지가 라커룸으로 뛰어내려왔다. '병지삼촌'이 위기의 순간, 골문 앞에 선 후배 류원우에게 따뜻한 조언을 건넸다. "한쪽만 생각하지 말고 양쪽을 다 생각해. 침착하게 기다려라. 반드시 기회가 온다."

선축은 강릉시청이었다. 첫번째 키커 이성민의 공이 류원우의 견제에 막혀 허공으로 떴다. 전남의 첫 키커는 웨슬리였다. '강심장의 상징' 파넨카킥을 시도했다. 지난달 21일 부산전에서 배짱좋은 파넨카킥으로 페널티킥 골을 신고했었다. 그러나 자신감 넘쳤던 웨슬리의 첫 슈팅은 보기좋게 강릉시청 골키퍼 석형곤의 손에 걸렸다. 강릉시청 2번째 키커 김준범이 성공했다. 전남 2번째 키커 코니의 볼은 크로스바 위로 높이 떠버렸다. 0-1, 불리한 상황, 이번엔 강릉시청 이종혁의 방향을 류원우가 완벽하게 읽어냈다. '병지삼촌'의 조언을 떠올렸다. 침착하게 읽고 날렵하게 움직였다. 전남 베테랑 이상호가 골망을 흔들며 스코어는 1-1이 됐다. 강릉시청 4번째 키커 손대성이 성공하고, 전남 이용승이 실축하며 다시 1-2로 밀렸다. 강릉시청 5번째 키커 김태진이 성공하면 끝나는 경기였다. 김태진의 공이 뜨며 실축, 전남 박승일의 가벼운 성공으로 승부는 또다시 원점이 됐다. 5번의 대결에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초반 베테랑 위주로 키커를 정했던 하 감독은 "자신 있는 사람이 차라"며 선수 스스로 순번을 택하게 했다. 양팀의 6~9번째 키커들이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자신만만하게 번갈아 골망을 흔들었다. 전남 8번째 키커 이중권에겐 운도 따랐다. 땅을 강하게 찬 볼이 정확히 골망 한복판을 꿰뚫었다. 강릉시청의 10번째 키커 이현준의 슈팅을 류원우가 두손으로 쳐냈다. 선방이었다. 전남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전남 코칭스태프는 이날 강릉시청의 날선 공격을 막아낸 '수훈갑' 골키퍼 류원우를 해결사로 내세웠다. 선방에 이어, 골로 승부를 결정할 천금의 기회였다. 하지만 류원우의 슈팅은 골키퍼 발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리고 말았다. 또다시 원점이 됐다. 오후 7시30분 시작된 경기가 밤 10시30분을 넘어 심야로 치닫고 있었다. 11~13번째 키커가 모두 성공하며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류원우는 관중석에서 간절한 팬의 외침을 들었다. "류원우 파이팅! 하나 막고, 집에 갑시다!" 강릉시청 14번째 키커가 자신있게 걸어오는 순간, 승부를 내기로 결심했다. "마지막 순간 느낌이 왔다. 왼쪽을 택했다. 마지막 키커의 공이 왼쪽 골대 모서리에 맞았다." 손대성의 실축, 박승일의 성공으로 전남은 승리했다.

천신만고끝에 16강행을 이룬 후 골키퍼 류원우는 "그냥 웃음이 나더라. 선생님들은 영웅 만들어 주시려고 기회를 주셨는데 하마터면 역적될 뻔했다. 실축하고 못막아 졌으면 울었을 것"이라며 아찔했던 순간의 긴장감을 전했다.

K-리그 역대 최장 승부차기 기록은 2000년 6월 14일 부산 구덕경기장에서 펼쳐진 정규리그 부산-성남전이다. 당시 정규리그는 90분간 승부를 가리지 못하면 승부차기하는 방식이었다. 전후반 2-2로 경기를 마친 후 양팀 13명의 선수가 승부차기를 했다. 부산 안정환 마니치 김학철 전우근, 성남 신태용 박남열 김상식 이상윤 김대의 등 레전드들이 키커로 나섰다. 11대10으로 성남이 승리했다.

28명의 선수가 피말리는 킥 전쟁을 펼친 FA컵 전남-강릉시청의 '진기명기' 승부차기는 국내 최장 기록으로 남게 됐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 당신이 좋아할만한 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