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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 후 리그 18경기가 지났다. 출전 기록은 전무하다. 최근에는 벤치에서 조차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A대표팀 주장이자 한국 축구 최고의 공격수로 꼽히는 박주영(26·아스널)의 현주소다. 한국인 9호 프리미어리거라는 명함조차 내밀기가 부끄럽다.
가뭄에 콩 나듯 온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EPL 명문 아스널은 내로라 하는 선수들의 집합소다. 처음부터 주전 자리를 꿰찬 선수는 드물다.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적은 출전 기회 속에 두각을 드러내는 수밖에 없다. 박주영이 아스널 입단 후 치른 경기는 네 번 뿐이다. 최근 아스널과 벵거 감독을 두고 "박주영에게 과연 얼마만큼의 기회를 줬는가"라는 비난이 나오는 근거다. 그러나 4경기에서 맞닥뜨린 상대 면면을 보면 박주영에게 충분히 기회는 돌아갔다고 봐야 한다. 슈르스버리전을 제외하면 볼턴, 맨시티, 올림피크 마르세유(프랑스) 같은 무게감 있는 상대를 만났다. 아스널의 선수층을 감안하면 분명 기량과 가능성을 테스트할 수 있는 무대였다. 박주영은 볼턴전에서 역전 결승골을 터뜨리면서 주가가 급등했으나, 곧이어 치른 마르세유전에서는 시종일관 부진한 끝에 결국 교체아웃됐다.
마르세유전이 박주영에겐 승부처였다. 당시 승리가 절실한 상황에서 벵거 감독은 붙박이 주전 판 페르시 대신 박주영을 히든카드로 내밀었다. 박주영이 리그1 AS모나코에서 세 시즌을 뛰며 수준급 공격수라는 점을 증명한데다, 마르세유와의 맞대결에서 2골을 기록할 정도로 뛰어난 감각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볼턴전서 기록한 마수걸이 골도 희망을 가질 만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박주영은 아스널 팀 전술에 전혀 녹아들지 못했다. 움직임은 엉성했고, 스피드도 느렸다. 패스 연결 통로를 찾지 못해 볼을 끌다 상대에게 빼앗겨 역습을 허용하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슈팅은 단 한 개도 없었다. 선수 부진에 대해 특별한 멘트를 하지 않는 벵거 감독이 마르세유전 뒤 공개적으로 "실망스럽다"는 표현을 한 것은 박주영에 대한 기대감을 상당부분 접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마지막 기회로 여겨졌던 맨시티전에서도 전후반 90분 풀타임을 소화했지만, 슈팅 1개 외에 별달리 눈에 띄지 못했다. 이런 성적은 결국 박주영이 EPL 벤치 자리마저 마루앙 샤막과 옥슬레이드 챔버레인 같은 경쟁자들에게 내줘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조광래 A대표팀 감독은 박주영을 가장 신뢰했던 지도자 중 한 명이다. 박지성(30·맨유)이 지난 1월 카타르아시안컵을 끝으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자 주저없이 주장완장을 물려 줄 정도로 실력을 인정하고 있다. 이런 믿음에 보답하듯 박주영은 A대표팀에서 맹활약 했다. 그러나 아스널에서는 A대표팀에서 보여줬던 날카로움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A대표팀 사령탑에서 물러나기 직전까지 박주영의 일거수 일투족에 주목했던 조 감독은 "박주영의 부진은 모나코와 아스널, 리그1과 EPL의 근본적인 차이점과 연관이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모나코 시절 박주영은 최전방에서 동료들이 연결해주는 패스를 골로 마무리 하는 역할을 맡았다. 활동폭이 크지 않아도 문전 앞에서 어떻게든 해결을 해주면 됐다. 리그1에서는 이런 공격 형태가 통했던 편"이라면서 "하지만 아스널은 최전방 공격 임무를 맡더라도 중원에서부터 경기를 풀어가야 한다. 패스로 경기를 풀어가는 팀 스타일 상 2선에 위치한 동료와의 패스 연결과 위치 변화도 중요하다. 스피드도 더 끌어 올릴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조 감독은 "박주영은 K-리그와 리그1에서 골잡이로 자신감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는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보다는 뭔가 변화를 줘야 한다는 생각을 깨달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영국 현지 언론들도 박주영이 아스널에서 주전 경쟁을 펼치기 위해서는 스피드를 더 살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꾸준히 지적하고 있다. 판 페르시는 최전방 원톱이지만 공격 시에는 하프라인부터 동료들을 이끌고 공격을 주도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있다. 벵거 감독이 "박주영은 리그에 나설 준비(몸 상태)가 됐다. 하지만, 더 해 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결국 두 리그 간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깨닫고 스피드를 빨리 키우라는 지적과 일맥상통한다.
낮은 자세와 변화 만이 살 길이다
2012년 박주영이 보다 많은 기회를 얻기 위한 키워드는 간단하다. 변화만이 살 길이다. 그동안 자신이 갖고 있던 것들을 과감하게 내려놓고 새로운 자세로 훈련과 경기에 임할 필요가 있다. 공격수의 자부심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어떤 부분에서 달라져야 하는지 냉정하게 짚어보고 주변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A대표팀 주장이기 때문에 더 잘 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벗어낼 필요가 있다. 주전으로 뛰지 못하는 선수에게 자존심은 사치다. 대표팀의 부름도 이런 상황이라면 요원하다. 낮은 자세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2012년 박주영의 주전 경쟁에는 호재가 있다. 주전 자리를 굳힌 제르비뉴(코트디부아르)와 판 페르시의 백업 역할을 맡고 있는 샤막(모로코)이 1월 중순부터 가봉과 적도기니에서 열리는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참가로 6주간 자리를 비우기 때문이다. 이 기간 아스널이 활용할 수 있는 최전방 백업 카드는 챔버레인과 박주영 뿐이다. 판 페르시가 쾌조의 활약을 펼치고 있지만 워낙 많은 경기를 뛰고 있는 만큼 체력과 부상 관리가 변수로 떠오른 상황이다. 때문에 벵거 감독이 로테이션 체제로 공격진을 운영할 것으로 보이며, 이 때 박주영이 기회를 부여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국 현지 언론들은 박주영이 쉽게 기회를 받지는 못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때 아스널에서 활약했던 티에리 앙리(뉴욕 레드불스)의 단기 임대 소식이 들리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벵거 감독은 "겨울 이적시장을 통한 공격수 영입은 없다"고 밝혔으나, 최근 입장 변화를 시사했다. 전망대로 앙리가 아스널에 임대신분으로 둥지를 틀 경우 박주영의 주전경쟁은 한층 힘겨워질 것으로 보인다. 새해에는 벵거 감독의 생각을 바꿔놓을 만한 달라진 모습이 필요하다.
박주영은 앞으로 10년여 간 한국 축구의 간판 공격수로 활약할 소중안 인재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앞으로 박주영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A대표팀 선배 이영표는 "그간의 경험에서 따져볼 때 팀은 위기를 이겨낸 뒤 더욱 강해지는 모습을 봐 왔다"고 말했다. 선수도 마찬가지다. 시련을 이겨내면 더 강해질 수 있다.
박상경 기자 kazu11@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