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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나 시집 안 갈 거야. 엄니 하고 같이 있을 거야."
"싫어. 싫어. 시집가기 나는 싫어∼ 얼굴도 모르는 신랑 나는 정말 싫어∼"
투정을 부리는 것도 잠시, 어느새 그는 식을 올리고 신방에 들어선다.
"그만 잡시다. 안 잘 거요?"
남편은 걸걸한 목소리로 아내를 달랜다. 어른스러운 척하지만 어색함에 몸 둘 바를 모르는 게 느껴진다.
지난달 31일부터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하고 있는 '벽 속의 요정'은 김성녀의 관록이 빛나는 작품이다. 그는 뮤지컬 모노드라마 장르인 이 작품에서 무려 32개의 배역을 소화한다. 철없는 여자아이부터 엄한 할아버지까지 자유자재로 말투와 목소리를 바꿔가며 관객을 극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스토리는 스페인 내전 당시 30년 동안 벽 속에 몸을 숨기고 살아간 아버지와 딸의 실화에서 따왔다.
일본 작가 후쿠다 요시유키의 원작을 극작가 배삼식이 한국전쟁으로 30년간 벽 속에 숨어 살아온 아버지와 홀로 가정을 지킨 어머니, 벽 속에 요정이 산다고 믿는 딸의 이야기로 각색했다. 당초 번안을 반대했던 원작자는 한국 공연을 보고서 "또 다른 하나의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김성녀는 50대 중반이던 2005년 첫 공연 때부터 이 작품을 이끌었다. 초연 당시 예술계 최고 영예인 올해의 예술상과 동아연극상 연기상 트로피를 거머쥐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초연 20년째를 맞아 열리는 이번 공연에서 김성녀는 이전보다 힘을 뺀 연기로 120분간 집중력을 발휘한다.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캐릭터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에너지는 이 같은 '내려놓음'에서 나온 듯하다.
음악도 이 작품의 또 다른 즐길 거리다. 김성녀가 각기 다른 캐릭터로 부르는 12곡의 노래는 연극과 뮤지컬을 함께 보는 것 같은 묘한 매력을 안긴다.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일명 '계란 팔이' 장면이 대표적이다. 바구니를 옆구리에 낀 그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객석으로 나와 관객에게 달걀을 건넨다. 그의 능청스러운 즉흥 연기에 관객들 사이에선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무대로 돌아간 그는 순식간에 구슬픈 톤으로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를 이어간다. 몇 분 사이에 달걀을 소재 삼아 완전히 상반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감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김성녀는 극단을 통해 이번 공연이 '벽 속의 요정'을 계속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앞으로 이 공연을 몇 살까지 할 수 있을까,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다. 하지만 극의 완성도가 떨어지면 그건 배우로서 무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공연은 아마 그런 결정을 지을 기회일 것 같다"며 "체력과 여건이 허락하는 한 계속 무대 위에서 연기하고 싶다"고 전했다.
이번 공연의 연출도 김성녀의 남편이자 연극계 거장 손진책(77)이 맡았다. 공연은 오는 10일까지 총 열흘간 열린다.
rambo@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