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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대선 박빙 판세에 지지 선언 보류한 언론 늘어
올해는 대선을 10여일 앞두고 워싱턴포스트(WP)가 이런 전통을 깨 주요 편집 간부들이 항의 사임하고 독자 수십만명이 WP를 떠나는 등 후폭풍이 거세다.
미국 공영 라디오 NPR에 따르면 WP 최고경영자(CEO)인 윌리엄 루이스가 지난 25일(이하 현지시간) 이번 대선부터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후 이달 28일 오후까지 20만명이 넘는 WP 독자가 디지털 구독 계약을 해지했다. WP의 종이 신문이나 디지털 신문을 보는 유료 구독자 총 250만명의 약 8%를 사흘 만에 잃어버린 것이다.
◇ WP 사주 "특정 후보 지지, 매체 편향성 인상만 줄뿐"
진보 성향 신문으로 꼽히는 WP는 지지 후보를 표명하지 않았던 1988년 대선을 제외하고는 1976년부터 모든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이번에도 민주당 카멀라 해리스 후보 지지를 선언하는 사설을 작성했다가 이를 발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체 기사를 통해 "그 결정은 사주인 아마존 창업자 베이조스가 내렸다"고 스스로 밝혔다. 베이조스는 2013년 WP를 인수했다.
루이스 CEO는 이번 결정에 베이조스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으나 신문 안팎에서 반발이 이어졌다. 신문 칼럼니스트 로버트 케이건이 사임했고, 여러 논설위원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WP 전 편집국장 마티 배런은 언론 인터뷰에서 "이번 결정을 3년 전, 2년 전, 혹시 1년 전에 했더라면 괜찮았을 것"이라면서 "분명 타당한 결정이지만 이 결정은 선거를 몇 주 앞두고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사주 베이조스가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을 감안해 이번 결정을 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WP가 '지지 대선 후보 없음'을 발표한 당일 베이조스가 소유한 우주기업 블루 오리진의 데이비드 림프 CEO가 트럼프와 만난 것도 논란을 키웠다. 이 신문 노조는 항의 성명을 냈고, 오피니언 담당 필진 17명은 성명을 통해 "신문의 근본적인 편집 신념을 포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파문이 커지자 베이조스는 28일 WP 홈페이지에 '불편한 진실:미국인들은 뉴스 미디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이번 결정은 매체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특정 신문의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은 선거의 향방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다"며 "그런 지지 선언은 해당 매체가 편향적이고, 독립적이지 못하다는 인상만 줄 뿐"이라고 했다.
민주당 텃밭으로 꼽히는 캘리포니아주의 유력 일간지 로스앤젤레스(LA)타임스도 이달 26일 편집위원회 차원에서 민주당 해리스 후보 지지를 선언할 예정이었으나 사주 일가의 반대로 계획을 철회했다고 NYT가 보도했다.
◇ 전통 고수 NYT "해리스가 유일한 애국적 선택"
반면 NYT는 일찌감치 해리스 후보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 1860년 이래 160년 넘게 이어진 전통을 지켰다.
이 신문은 지난달 30일 편집위원회 명의로 올린 사설에서 "유권자들이 그와 정치적 이견이 있다고 하더라도 해리스만이 대통령을 위한 유일한 애국적인 선택"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후보에 대해서는 "트럼프의 두 번째 임기는 첫 임기보다 훨씬 더 큰 피해와 분열을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진보 색채가 강한 NYT는 1952년과 1956년 공화당 후보였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잇달아 지지한 것을 끝으로 1960년 존 F. 케네디 후보부터는 줄곧 민주당 후보만 지지해왔다.
유력 언론 가운데 그동안 지지 후보를 공표하지 않은 곳도 있다. 미 언론에 따르면 이번 대선에서 미국의 주요 언론 가운데 NYT와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뉴요커, 보스턴 글로브, 휴스턴 크로니클 등이 해리스 후보 지지 입장을 밝혔다. 뉴욕 포스트와 워싱턴 타임스, 라스베이거스 리뷰 저널 등은 트럼프 후보를 지지했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더힐은 이번 대선이 막판 초박빙 판세로 흐르면서 WP와 LA타임스를 비롯한 많은 언론이 후보 지지 선언을 보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 '사실 보도'와 '의견 제시' 별개라는 원칙 지켜
미국 언론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관행은 기본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수정헌법 1조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히는 글은 사설란에만 실린다. 뉴스에서는 특정 후보에 관한 호의적이거나 편파적인 보도를 할 수 없다. 사설을 통해 회사 차원의 지지 후보를 공표하되 보도에선 공정성을 지킨다는 원칙이 있기 때문에 이런 관행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미국 내에서도 이런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비판이 강해지고 있다.
통상 신문사가 지지 후보를 정할 때는 후보의 인기나 당선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고 자체 원칙을 따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체로 풍부한 경험과 전문 지식이 있는 논설위원진이 오랜 연구와 토론을 거쳐 대통령의 조건과 품성을 평가하고 유권자인 국민에게 알리는 차원에서 지지 후보를 공개하는 식이다.
1984년 대선 당시 NYT와 WP가 공화당 후보였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대신 패색이 짙었던 월터 먼데일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 것도 당선 가능성이 아닌 자체 원칙을 따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언론의 대선 후보 지지가 선거 판세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김진우 국민대 교수는 "언론이 예상 밖의 후보에 대해 지지를 선언했다면 몰라도 대체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후보 지지이기 때문에 선거 판세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bondong@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