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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진 것은 아니다. '기억'의 형태로 우리의 몸과 마음에 남아있다.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아련함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미련과 회한으로 응고되어 끈질기게 현재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옛날 일은 선명한데 최근 일은 기억이 나지 않는' 생리학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친숙한 기억들에 대응해 시를 외우는 '기억의 궁전' 기법을 시도한다. 이 방법은 그를 자연스레 과거로 이끈다. 그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캐나다 퀘벡의 아파트 번지수가 바로 이 연극의 제목인 '887'이다. 이제 생리학적 기억은 인문학적 기억으로 바뀐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일수록 지나고나면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다. 변두리 서민아파트에서 택시운전사였던 아버지와 선량한 어머니, 그리고 누나, 여동생과 가난하지만 정겹게 살았던 그의 일상이 잔잔하고, 위트있게 펼쳐진다. 프랑스계로서 그의 정치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던 퀘벡 분리주의 운동을 비롯한 1960~70년대의 사건들이 배경으로 깔린다. 연출가겸 배우 르빠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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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건들은 대형 스크린에 담아 역동성을 부여하고, 개인적인 추억은 미니어처를 실시간으로 촬영해 영상으로 띄운다. 그림자극과 마임도 곁들인다. 덕분에 르빠쥬 혼자 출연하는 모노드라마이지만 마치 수많은 배우가 함께 한 듯하다. 소소하지만 기발한 아이디어가 곳곳에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진화된 테크놀로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현대 연극의 트렌드를 만날 수 있다.
르빠쥬는 '인간에게 기억이란 이런 것'이란 식의 결론은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기억을 다루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것은 '기억과의 적절한 거리'이다. 행복한 추억일지언정 신파에 빠지지 말고, 아픈 기억은 살짝 놓아주라고 말하는 듯 하다.
르빠쥬가 '스피크 화이트'를 다 외워 열정적으로 낭송하는 피날레는 매우 인상적이다. 2시간 동안 혼자서 무대를 이렇게 채우니 기립박수가 터져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6월2일까지.
김형중 기자 telos21@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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