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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기획은 제대로 된 '기자 영화'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기자가 주인공인 미스터리, 스릴러가 목표였다. 기자의 순기능을 간과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 과정에서 특종 관련 책을 읽다가 윤석양 이병 사건을 만났다. 1990년 윤 이병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사건이었다. 즉시 윤 이병과 관계자들을 만나 취재했다. 처음에는 사건을 거의 그대로 영화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건은 의외로 드라이했다. 윤 이병은 "영웅으로 불리는 게 싫다"는 뜻을 알려왔다. 그래서 픽션을 가미했다.
윤 이병 사건에서 가장 흥미를 끈 부분은, 서울대 앞에 실제로 있었던 '모비딕'이라는 카페였다. 그곳에서 보안사 직원들이 서빙하고, 도청도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제목에 그대로 사용했다. 허먼 멜빌의 동명 소설 내용과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참고했다.
처음 기획한 이야기에서 많이 바뀌었지만 영화의 뼈대는 음모론이 아니라 믿음, 휴머니즘이다. 그래서 핵심 인물은 윤혁이 된다. 박 대표는 "'모비딕'은 인간과 인간의 믿음에 관한 영화"라고 강조했다. 윤혁(진구)과 이방우 기자(황정민), 기자와 데스크의 신뢰 문제가 중심이라는 것이다. "이야기의 원형은 휴머니즘"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영화에는 주인공 이방우 기자가 고래를 만지는 판타지 장면이 두 차례 등장한다. 이는 영화의 전체 흐름과도 관련이 있다. 한 기자의 능력으로는 음모론의 전체 모습을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한계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박 대표는 "고래를 만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시대 배경이 1994년인 것은 관객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 중 하나다. 2011년 현재와 시간적 거리감이 있고, 뚜렷이 떠오르는 역사적 사건이 없어 다소 느닷없다는 느낌을 준다. 여기에는 뒷얘기가 있다. 시나리오에는 있었지만 영화에서는 빠진 내용이 있다. 박 대표는 "당시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직후다. 남북관계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남북관계나 시대 흐름을 배경에 놓고 영화를 보면, 사건의 흐름이나 인물의 내면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컴퓨터가 등장하면 암호를 너무 쉽게 찾는다는 점도 고려했다.
박 대표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벤처회사 CEO로 일했다. 음성인식기술 관련 회사였는데, SK로부터 투자받을만큼 잘 나갔다. 그러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2년 전 팔레트픽처스를 설립했다. '모비딕'은 그의 첫 작품이다.
두번째 작품도 한창 촬영 중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 '비스티 보이즈'의 윤종빈 감독이 연출하고 연기파 배우 최민식, 하정우가 출연하는 '범죄와의 전쟁'이다. 1990년 노태우 정부 시절이 배경이다. 강자에는 약하고 약자에는 강한 한 남자가 격동의 현대사를 거치며 깡패 세계에 몸담는 이야기다. 현재 3분의1 정도 촬영을 마쳤고, 올해 말 개봉할 예정이다.
박 대표는 "앞으로 블록버스터보다 규모는 작지만 단단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말로 팔레트픽처스의 색깔을 설명했다.
임정식 기자 dad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