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프로야구는 김경문 감독에게 빚을 졌다.
2008년 7월의 어느날이었다. 베이징올림픽 야구대표팀이 출정에 앞서 코칭스태프 회식을 했다. 당시 대표팀 사령탑인 김경문 감독도 당연히 함께 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모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동메달이 목표라는 얘기들을 했다. 한국야구가 시드니올림픽 동메달이 최고 기록이었고, 또 선수들도 동메달이면 병역특례가 가능하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느낌이 좋다, 금메달도 가능하다'는 덕담이 나오기 시작했다. 술이 몇순배 돌고 나서 모두가 의기투합했다. 그래, 내친 김에 금메달까지 따보자고. 잠실구장에서 열린 연습경기때 쿠바를 한차례 깬 것도 선수단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 베이징으로 떠나기 전부터 이미 목표는 금메달이었다."
이후 모두가 알고 있는대로 진행됐다. 한국 야구대표팀은 올림픽 본선에서 리그전부터 결승전까지 9전 전승이란 성적을 거두면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한국 남자 단체 구기종목 사상 첫 올림픽 골드메달이었다. 미국, 일본, 대만은 물론 결승에서 아마추어 최강자 쿠바까지 꺾었다. 순간순간마다 명장면이 쏟아졌다. 토요일 저녁 박진만-고영민-이승엽으로 이어진 더블플레이로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한국의 아파트촌에선 약속이나 한듯이 함성이 울려펴졌다.
김경문 감독은 올림픽에서 미국 스타일도, 일본 스타일도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술을 운용하며 승리했다. 한국 야구의 힘을 전세계에 알렸고, 내부적으로는 한여름밤의 팬심을 야구로 끌어모으는 역할을 했다.
김경문 감독이 훗날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힘을 모아줬기에 가능한 금메달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정도는 자랑하고 싶다. 주부들이 내 이름을 알게 됐다. 올림픽 금메달의 힘이 아니겠는가."
프로야구는 2007년부터 조금씩 관중이 증가했다. 2006년 3월의 제1회 WBC때 한국이 4강에 올랐다. 하지만 당시 쾌거는 프로야구 흥행으로 연결되진 못했다. 2006년 관중수는 전년에 비해 35만명 가까이 줄어들었다. 2007년에 400만명대로 올라선 관중수는 올림픽이 열린 2008년에 95년 이후 처음으로 500만명대를 회복했다.
올림픽 금메달의 영향이 분명 컸다. 대다수 야구인들이 "주부까지 야구에 관심을 갖게 만든 올림픽이야말로 프로야구 부흥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고 말한다. 2009년 3월의 제2회 WBC에서 김인식 감독이 이끄는 야구대표팀이 준우승을 차지하며 불씨를 이어갔다. 결국 최근 몇년간 프로야구 관중수가 급격하게 증가하는데 김경문 감독이 크게 공헌한 것이다.
올해 프로야구는 최초로 관중 600만명을 돌파해 역대 최고 흥행기록을 세울 게 유력하다. 정작 이같은 흥행의 불씨를 마련해준 김경문 감독은 이제 야인 신분이 됐다.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때론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뚝심과 한편으론 유연한 전술 변화를 통해 뛰어난 지도자로 인증받은 김 감독이다. 현장으로 돌아오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김경문 야구'를 볼 수 있을 때까지, 한국프로야구는 그에게 진 빚을 잊지 않을 것이다.
김남형 기자 star@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