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평창유치]바덴바덴-취리히-몸바사…국제대회 유치사

박상경 기자

기사입력 2011-07-07 00:17


평창이 드디어 해냈다. 한국은 지구촌 4대 제전인 하계·동계올림픽,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을 모두 유치하게 됐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일본 러시아에 이어 세계 6번째로 이룬 쾌거다.

한국이 세계대회 유치에 나선 것은 꼬박 32년 전인 1979년이다. 당시 목표는 1988년 하계 올림픽 유치였다. 그러나 순탄치 않았다. 유치 계획 수립 직후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했고, 재정문제까지 불거지면서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개최지 접수 마감일에서야 간신히 유치 쪽으로 발걸음을 돌린 한국은 일본 나고야와 경쟁을 벌였다. '개발도상국은 시기상조'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는 우려섞인 전망이 쏟아졌다. 1981년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 결과는 52대27로 한국의 압승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국가적 지원과 물량공세 대신 화환을 IOC 위원들에게 전달한 유치위원회의 '감성 접근'이 통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며 세계에 강한 인상을 남긴 한국은 2002년 월드컵 유치에 도전했다. 경쟁자는 이번에도 일본이었다. 일본은 1986년 멕시코월드컵 이후부터 일찌감치 월드컵 유치전을 펼친 반면, 한국은 1993년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기간에 7년의 격차가 났지만, 한 차례 패배를 맛봤던 일본은 필사적인 유치전을 전개했다. 이에 한국은 축구를 통한 분단국가의 아픔 해소와 세계 평화의 슬로건을 걸고 맹추격했다. 양국간 국민감정까지 섞이면서 유치전은 점점 과열 양상으로 치달았다.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기 힘들었던 국제축구연맹(FIFA)은 199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가진 집행위원회에서 주앙 아벨란제 회장과 유럽축구연맹(UEFA)이 제안한 한일 공동개최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공동개최 결정 뒤 월드컵 트로피를 맞잡은 정 회장과 나가누마 겐 일본 유치위원장의 상반된 표정이 한때 화제가 됐다.

한국의 다음 도전은 세계육상선수권 유치였다. 2003년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른 대구가 출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앞선 두 대회보다 더욱 열악한 유치 환경이었다. 마라톤 외에 올림픽 무대에서 두각을 드러낸 선수가 없는데다, 브리즈번(호주)과 모스크바(러시아) 바르셀로나(스페인)라는 강력한 경쟁도시를 만나 승리를 점치기 힘들었다. 그러나 열정이 세계 육상인의 마음을 흔들었다. 한국은 케냐 몸바사에서 열린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집행이사회에서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경쟁도시를 따돌리고 유치권을 획득했다. 평창은 두 차례의 실패를 겪었으나, 결국 마지막 승부에서는 온 국민에게 감동의 웃음을 선사했다.
박상경 기자 kazu11@sportschosun.com

:) 당신이 좋아할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