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김영록 기자] 경기중 코칭스태프의 선넘는 행동이 나왔다. 배구계는 물론 팬들의 분노도 쏟아지고 있다. 축하받아야할 승자의 마음만 상처입었다.
17일 인천 삼산체육관에서 열린 흥국생명과 정관장의 경기. '배구황제' 김연경이 이끄는 흥국생명은 자타공인 배구계 최대 팬덤을 지닌 팀이다. 올시즌 여자부 선두를 질주중인 흥국생명이 현대건설의 단일시즌 연승 신기록(15연승)에 도전하는 경기였다. 올시즌 강력한 우승후보간의 격돌인 만큼 현장의 열기도 한층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2세트 경기 도중 경악스런 상황이 발생했다. 19-17에서 고희진 정관장 감독이 전영아 부심에게 경기 진행에 관한 항의를 하는 과정이었다.
흥국생명의 다니엘레 수석코치가 정해진 '선'을 넘었다. 상대 코트 진영으로 넘어온 그는 고희진 감독을 향해 허리를 숙인 채 뭐라 말을 건넸다.
순간적인 상황에 깜짝 놀란 흥국생명 스태프가 황급히 달려와 코치를 '끌고' 갔다. 고희진 감독은 황당한 표정으로 항의를 이어갔지만, 추가적인 행동은 취하진 않았다. 경기 후 취재진의 설명 요청에도 "당황스럽다. 일어나지 말아야할 일이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연맹이나 구단에서 잘 처리할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이날 경기는 부키리치와 메가가 맹활약한 정관장의 세트스코어 3대1 승리로 끝났고, 흥국생명의 연승 행진은 마감됐다.
하지만 다니엘레 코치의 표정과 행동은 중계 영상에 고스란히 남았다. 차상현 해설위원은 "심판에게 불만을 표출할 수 있고, 감독들끼리 액션이나 싫은 표현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코치가 상대팀 감독을 조롱하는 듯한 행동과 표현은 본적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경기가 끝난 뒤에라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고희진 정관장 감독을 향해 외치는 다니엘레 흥국생명 코치. 사진=KBSN스포츠 방송 캡쳐
경기 후 박미희 해설위원도 "(경기로 인해 격앙된)앞뒤 상황을 보더라도 코치가 상대 감독에게 '조롱한 듯한, 험한 말을 했을 듯한' 행동은 옳지 않다. 이강주 정관장 코치가 아본단자 흥국생명 감독에게 저렇게 한다고 생각해보라. 해서는 안될 일"이라고 강조했다. 박철우 해설위원 역시 "선수들끼리는 언쟁이나 (감정적)부딪침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심판의 제지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그 이상의 강력한 조치가 분명히 필요하다"고 거들었다.
이번 일에 대해 정관장은 18일 오전 한국배구연맹(KOVO)에 항의차 공문을 발송했다. 정관장 관계자는 "현장에서는 해당 상황에 대해 아무런 징계가 나오지 않았다. 연맹 차원에서 (징계 여부를)검토해달라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흥국생명 역시 "다니엘레 코치는 조롱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내용과 별개로 잘못된 행동이다. 정관장 구단과 고희진 감독에게 죄송하다. 사과를 전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연맹은 해당 논란에 대한 입장을 내부적으로 검토중이다. 다니엘레 코치에 대한 상벌위원회 개최가 유력하다.
사진제공=KOVO
다만 배구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아쉬워하는 또다른 지점도 있다. 바닥에 떨어진 V리그 심판의 권위와 직결되는 문제다. 왜 심판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
첫째, 코치가 경기 도중 상대팀 감독에게 직접 (긍정적이진 않을)말을 건넸다. 둘째, 이 과정에서 해당 코치는 상대 코치진의 영역, 코트 너머로 넘어왔다는 점이다.
두 가지만으로도 다니엘레 코치가 징계를 받아야할 이유는 충분하다. 배구계에선 "심판이 해당 코치에게 최소한 세트 퇴장만 명했어도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다를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다니엘레 코치는 V리그에 오기 전에도 10년 넘게 풍부한 경력을 지닌 배구 지도자다. 그가 왜,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을 했을까. 아무리 격앙된 상황이었다곤 하나 '지금, 이곳(V리그 흥국생명)에선 그래도 된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을 지우기 어렵다.
사진제공=KOVO
연맹 관계자는 "심판이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경기 도중인 만큼 정준호 주심은 포지션 폴트 등 다음 상황을 준비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양팀 선수들과는 주심, 코치진과는 부심이 소통하는게 일반적이다.
또한 다니엘레 코치의 돌발 행동은 말그대로 V리그 20년 역사상 처음 벌어진 일이다. 모든 것을 밖에서 지켜보던 해설위원조차 "처음 겪는 일이라 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르겠다"며 당황할 정도. 현장에서 직접 겪은 심판이 순간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기 힘들었다는 설명이다. 외국인인 이상 다니엘레 코치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들리지도 않았고, 말 그대로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
사진제공=KOVO
하지만 겉보기만으로도 '선을 넘은' 행동인 것은 분명하고, 그럼에도 심판들은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일각에서 '심판이 흥국생명의 홈구장 분위기에 짓눌려 징계 등 판단을 보류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마치 주심 비디오판독을 통해 주심이 경기위원들에게 판정의 부담을 넘기듯,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심판으로서의 책임을 KOVO에 미룬 것이 아니냐는 의미다.
흥국생명 코치의 잘못된 행동과 그로 인한 여파로 리그 최강팀의 연승을 끊고 저력을 보여준 정관장의 승리는 축하받지 못하고 있다. 김연경을 비롯해 올시즌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는 흥국생명 선수단의 명예도 먹칠을 당할 위기다. 연맹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