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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할 때 그저 그런 신인이었다.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다. 소속 팀 마스코트 '호랑이'처럼 한번 잡은 먹잇감을 꽉 물었다. 스승의 시선까지 사로잡았다. 그리고 '무명'에서 '희망'으로 떠올랐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 데뷔전이었다. 울산 현대 신인 수비수 이지훈(23)의 성장 스토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지훈은 12일 벌어진 K리그 클래식 20라운드 대구와의 원정경기(3대1 승)에서 오른쪽 풀백으로 리그 신고식을 했다. 부담 백배의 데뷔전이었다. 울산은 19라운드 전북전서 0대4로 완패했고 주전 수비수 김창수와 리차드가 누적경고로 결장한 상태. 정동호마저 장기 부상으로 빠져있으니 딱히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이지훈을 U-23 선수로 선발 명단에 올린 김도훈 울산 감독은 경기 전 "오늘 이지훈이 뛰는 걸 봐서 측면 수비수도 보강할지 검토하겠다"고 했다. 이날 울산의 팀 사정상, 용병 공격수 3명을 총가동한 대구를 상대로 '초보'를 쓰는 건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이지훈의 데뷔전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뭘 못해서가 아니다. 울산이 10명 대 11명의 수적 열세를 딛고 3대1로 완승하고 단독 2위를 탈환한 이슈에 가려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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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와중에 김 감독은 숨은 공신으로 이지훈을 꼽았다. 그의 데뷔전을 점수로 매기자면 만점에 가깝다고 극찬했다. "아직 어린데 벌써부터 100점 주면 안되겠죠? 90점으로 해야하나?"라고 할 정도다.
이지훈은 후반 16분 다리에 쥐가 나는 바람에 김인성과 교체됐다. "쥐가 날 정도로 모든 힘을 다 쏟았다는 증거아니겠냐"는 김 감독은 "이지훈의 장점은 훈련이든, R리그에서든 잔머리 쓰며 조절하는 법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력을 쏟아붓는 것"이라고 말했다. 훈련때도 지쳐쓰러질 정도로 성실한 자세가 인상적이어서 믿고 써봤는데 부담스러웠을 데뷔전에서도 평소 모습을 보여주니 마음에 쏙 들 수밖에. 김 감독은 "이지훈의 그런 자세가 팀에도 활력이 된다. 그래서 더 기특하다"고 말했다.
이지훈이 이처럼 '미친 듯이' 뛰는 데에는 사연이 있다. 대학 졸업 후 우선지명으로 입단한 그는 시작부터 커다란 벽을 만났다. 같은 포지션에 기라성같은 국가대표 선배들이 있었다. 그렇다보니 구단의 즉시 전력감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고 신인 동기들보다 낮은 처우를 받아야 했다. 한켠에 마음 상처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청주 출생이지만 울산 현대고-울산대 등 울산 유스 출신으로 성장하며 울산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았던 터라 더욱 그럴 법했다.
하지만 이지훈은 '긍정의 힘'으로 이겨내기로 했단다. 그는 "선수 누구나 경기에 뛰고 싶다는 욕심이라는 게 있는데 그런 면에서 사실 힘들기는 했다"면서도 "김창수, 정동호 선배도 분명히 나와 같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이겨내지 못하면 선배들처럼 저 자리까지 갈 수 없겠다는 생각으로 현실을 빨리 받아들이니 오히려 성장하는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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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때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기회에 당황하지 않으려면 대비가 필요했다. 관중도 없는 훈련장에서 그토록 죽어라 뛰어다닌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기혹사'는 '생존수단'이기도 했다. "출전하지 못하는 만큼 기량적, 체력적으로 퇴보하게 마련이다. 내 스스로도 혹시 축구 실력이 죽을까봐 걱정이 되더라. 그래서 훈련때 모든 걸 쏟아내려고 했다."
이미지 트레이닝 연구도 했다. 울산의 클래식 경기 관전은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 선배 김창수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해서다. 원정경기는 방송중계로, 홈경기는 울산경기장 관중석 맨 윗자리를 찾았다. 경기 전체를 한눈에 파악하기 위해서였단다.
오랜 간절함과 준비 끝에 기회를 잡았고 감독으로부터 합격점도 받았다. 이지훈은 "출전 지시를 받고 기쁘면서도 부담감이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하기를, '부담으로 여기지 말고 내가 간절했기 때문에 이런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자. 실수를 하더라도 자신있게 하자. 자신감만 생각하고 후회를 남기지 말자'고 다짐했다"면서 "막상 킥오프 휘슬이 울리니 경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선배들처럼 울산의 레전드가 되고 싶다"는 이지훈. 울산은 흙속에서 똘똘한 '호랑이 새끼'를 찾은 셈이다. 그를 조련한 김 감독은 "김창수가 그간 혼자서 많은 경기를 소화해 걱정이었는데 조율할 수 있게 됐다. 사이드 풀백 고민도 덜게 돼 다행"이라고 화답했다.
최만식 기자 cm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