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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심판, 29년 판관생활 외로웠지만 박수받을 만 했다

김진회 기자

기사입력 2013-12-31 16:05 | 최종수정 2014-01-01 07:35


김건태 전임심판. 사진제공=한국배구연맹

2013년 12월 29일, '코트의 포청천' 김건태 한국배구연맹(KOVO) 전임심판(58)이 마지막 휘슬을 입에 물었다. 29년간 국내와 국제 무대에서 쉼없이 불었던 그 휘슬이었다. 2010년 국제배구연맹(FIVB) 국제심판에서 정년퇴직할 때 당시 FIVB 심판위원장에게 선물받았다는 그 휘슬이었다.

김 심판은 '심판계 살아있는 레전드'다. 프로배구가 태동했던 2005년 KOVO 심판위원장으로 재직했던 그는 2005~2006시즌부터 국내 프로배구 심판으로 9시즌을 보냈다. 1987년 국내 A급 심판이 된 이후 1990년 국제심판, 1998년 국제배구연맹(FIVB) 심판으로 활약했다. A매치 350여회, 그랑프리, 월드리그, 세계선수권, 올림픽 등 주요 국제대회 결승전 12회 등의 심판을 맡았다. 특히 심판위워장 시절 비디오 판독을 비롯해 트리플크라운, 재심요청제도 등을 마련하며 국내 프로배구의 기틀을 다지는데 공을 세웠다.

지난 31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김 심판의 목소리는 의외로 밝았다. "홀가분하다. 현역 은퇴는 예정돼 있던 것이었다." 29년의 판관 생활은 그야말로 인내, 그 자체였다. 그는 "그 동안 심판을 보면서 너무 힘들었다. 심판들의 모범이 돼야 한다는 중압감, 남보다 경기를 완벽하게 치러야 한다는 책임감, 전세계 배구 팬들이 지켜보고 있는 두려움이 양 어깨를 짓눌렀다"고 고백했다.

외로웠다. 그래도 철저한 사생활 관리에 대한 소신을 저버리지 않았기에 29년을 버틸 수 있었다. 그는 "철저하게 사생활을 관리했다. 심판은 대화 상대가 없다. 항상 홀로였다. 선수, 구단 관계자 등 관계자들과 접촉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평소 운동도 열심히 해서 체력도 길러놓고, 기도로 심리적인 안정감을 찾았다"고 했다.

'청렴'은 김 심판의 또 다른 이름이다. 국제대회에서 숱한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다. 국내외 관계자들이 김 심판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는 이유다. 그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 일본-중국의 8강전에서 심판을 보기 전 중국과 일본배구협회의 갖은 유혹이 있었다. 그 유혹들을 모두 뿌리쳤다. 신념이 흔들렸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청춘을 코트에 받친 김 심판은 항상 코트에서 1등 심판이었다. 그러나 가정에선 '빵점 남편', '빵점 아버지'였다. 김 심판은 "365일 중 150일을 집에 못들어갔다. 가정에선 죄인이다"며 가족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앞으로 아시아배구연맹 심판위원으로 활약하게 될 김 심판에게 판관 생활은 '행복'이면서도 '한'이었다. 그는 "심판 직업은 3D업종이다. 의료보험도 안된다. 연금도 없고, 퇴직금도 없다.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나는 떠나지만 후배들의 처우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진회기자 manu35@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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