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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 전설'이에리사 의원의 자서전'페어플레이'..."후배 체육인들의 푯대 되고싶다"

전영지 기자

기사입력 2020-10-05 05:00



"내 인생은 끝없이 길을 내는 작업이었다. 내 이름 앞에 내내 따라붙던 최초라는 수식어는 무거운 깃발이었다. 나는 '푯대'가 되어야 했다."

대한민국 여성 최초의 태릉선수촌장, 이에리사 전 국회의원이 50여 년 체육인의 한길을 담아낸 자서전 '페어플레이'(리즈앤북)를 출간했다. '사라예보의 전설, 19전 전승으로 세계를 제패한 2.5g의 승부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1979년, 탁구 국가대표 은퇴와 함께 20대 때 썼던 첫 자서전 '2.5g의 세계'에 이은 두 번째 자서전이다.

첫 자서전이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세계선수권에서 열아홉의 나이에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첫 금메달을 목에 걸고, 남녀탁구종합선수권 개인단식에서 중3 때 최연소 우승컵을 들어올린 후 지금껏 깨지지 않는 7연패 기록을 보유한 '위대한 선수' 이에리사의 삶과 노력을 담아냈다면 2020년 가을, 41년만에 새로이 출간된 자서전엔 여성 최초의 지도자, 여성 최초의 태릉선수촌장, 여성 체육인 최초의 국회의원 등 '최초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위대한 철녀' 이에리사의 치열한 인생과 '외롭고 높고 쓸쓸한' 분투가 빼곡히 담겼다. 매일 1000개의 드라이브를 반복하고, 태릉선수촌 운동장을 6km씩 달렸던 '승부사' 이에리사의 비범한 노력과 타협을 모르는 페어플레이는 이후 인생의 모든 도전에서도 한결같았다.




출처=이에리사 의원 자서전 '페어플레이'(리즈앤북)
이 의원은 자서전에서 '페어플레이' '원칙주의자'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명시했다. '내 성격은 날카롭다. 까다롭다. 물러서지 않는다. 그래서 타인들로부터 오해도 많이 받는다' '원칙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 무엇인가를 잃을 때도 있다. 사람을 잃는 게 가장 고통스럽다'는 처절한 자기 고백과 함께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내 인생의 법칙은 51대49다. 나는 일찌감치 49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중략) 나는 51의 비율을 상식, 원칙, 공정에 두었다'며 '페어플레이' 원칙에 입각해 흔들림 없이 살아온 인생을 후회없이 돌아봤다.

국회의원으로 일할 당시 '원칙주의' 에피소드는 특히 인상적이다. '공무로 해외출장을 갈 때 단 한번도 비즈니스석을 이용해본 적이 없다. 이코노미 좌석 티켓을 끊어서 탑승수속을 하면 어디에선가 항공사 직원이 나타났다. 업그레이드를 해주려는 것이다. 배려는 고맙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사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항공사 마일리지로도 얼마든지 좌석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 고쳐매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내가 비용을 지불하고 비즈니스석을 타더라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국회의원의 호사로 여겨질 것이다. 구설이나 오해를 부를 일은 애당초 하지 않으면 된다.'




원칙에 대해 의심받았던, 쓰라린 경험도 진솔하게 털어놓는다. 2014년 12월 정유라의 승마특혜 의혹이 불거졌을 때 정유라(개명후 정유연)를 옹호했다는 주장에 대해 이 의원은 '나는 그때까지 선수 정유연이 정윤회씨의 딸인 것도 몰랐다. 그저 내가 할 일은 체육인으로서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고, 판단기준은 대한체육회의 경기실적 증명서였다. 탄핵정국에서 나는 정유라를 비호한 적폐세력으로 몰렸다. 나는 그가 선수로서 기록해온 성적을 바탕으로 판단했고 한 사람의 체육인으로서 선수를 보호하고자 하는 원칙에 입각해 이야기했을 뿐 다른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 '정권이 보수건 진보건 나는 늘 체육계의 한 부분으로 내가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국회의원이 된 것 역시 정치를 하고자 함이 아니라 체육계를 위한 역할을 하자는 소명의식에서였다. 내 삶의 흔적은 대한민국 체육의 역사와 궤를 함께하기에 조금도 허투루 살 수 없었다. 이게 내가 원칙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밝혔다.

자서전에서 이 의원은 2013년 2월, 제38대 대한체육회장 선거를 '인생 최악의 게임'으로 꼽는다. '페어플레이를 원칙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규칙을 어기는 적수와 싸우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고 썼다. 당시 김정행 용인대 총장(28표)과 박빙의 승부끝에 3표 차로 진 이 의원(25표)은 이 선거가 남긴 두 가지 교훈에 대해 '첫째, 소문이 시간이 지나면 때로 진실로 둔갑한다는 것. 둘째, 나를 아는 사람은 나를 믿는다는 것'이라고 담담히 썼다. "대한체육회가 비리 의혹으로 수사받을 때마다 '뒤에 이에리사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인생을 그처럼 비겁하게 살지 않았다"고 했다.

이 의원은 여성 후배들을 향한 따뜻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자서전을 출간한 이유 역시 '후배들을 위한 푯대가 되고 싶다'는 진심이다. "그들이 책을 읽고 내 삶의 궤적을 통해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에 도달할 힘과 지혜를 얻길 소망한다. 내 인생이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노력하는 자만이 승리한다' 것"이라며 특별한 노력을 독려한다. "불공정의 벽을 구호로만 깨뜨릴 수 없다. 그 벽에 금이 가게 하는 것은 결국 여성 스스로의 노력이다. 그래서 나는 여성후배들에게 더 많이 공부하고 노력해서 특별한 결과물을 보여주라고 조언한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길은 대체불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독보적인 존재를 마다할 조직은 없다."




이 의원의 살뜰한 지도 아래 1988년 서울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레전드 복식조' 양영자-현정화는 헌사를 통해 "평생 우리 가슴에 남은 선생님의 가르침은 '운동만 잘하는 운동선수가 아니라 더 좋은 인간이 되라'는 말씀"이라고 돌아봤다. 최원석 전 대한탁구협회장(전 동아그룹 회장)은 추천사를 통해 "인생이라는 긴 승부처에서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이길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면 이에리사의 인생역정을 찬찬히 따라가 보길 권하고 싶다"고 했다. 김정길 전 대한체육회장은 "그는 여성체육인으로서 늘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갔다. 스포츠 변방이던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린 당대 최고의 선수로 출발해 지도자, 교수, 행정가, 국회의원으로 영역을 확장해온 그의 인생 여정은 개인의 삶을 넘어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와 궤적을 같이 한다"고 썼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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