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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휴먼스토리]6년의 기다림과 눈물, 원윤종-서영우 '실패' 아닌 또 다른 '시작'

김진회 기자

기사입력 2018-02-19 22:49


고교 졸업식 당시 어머니와 함께 한 원윤종. 사진제공=올댓스포츠

고교 2학년 때 농구경기를 하던 원윤종. 사진제공=올댓스포츠

평범한 체육교사를 꿈꾸던 대학생은 8년 전 인생이 바뀌었다. 지난 2010년 학교 게시판에서 썰매 국가대표 선발 포스터를 보고 보디빌더 출신 친구와 함께 재미삼아 지원했다. 말 그대로 참여일 뿐이었다. 부모님에게도 귀띔하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강원도에서 쉬다 온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덜컥 합격해버렸다.

당시 겉모습만으로 이 용 봅슬레이·스켈레톤대표팀 총감독(40)의 눈을 사로잡은 건 보디빌더 출신 친구였다. 평범한 대학생은 몸무게 75~80㎏의 마른 체형이었다. 그러나 이 감독이 선발한 건 왜소한 대학생이었다. 주인공은 봅슬레이 2인승 파일럿 원윤종(33·강원도청)이다. 의아했다. 그러나 이 감독은 그 때로 다시 돌아가도 '원윤종'이란다. "일주일 정도 경험해보니 원윤종이 여러 종목에서 만능이더라. 다재다능한 면을 보고 원윤종을 선택했다. 썰매에 한 번이라도 태우지 않으면 후회하겠더라. 보이기에는 친구가 더 좋았는데 마음이 자꾸 원윤종에게 끌렸다." 원윤종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그렇게 시작됐다.

태극마크를 단 원윤종의 강점은 특유의 근성과 집중력이었다. 차분한 성격인 원윤종은 강점을 인정받아 곧바로 주행을 담당하는 파일럿으로 발탁됐다. 천재는 아니었지만 성장은 눈부셨다. 첫 시즌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13위에 오르더니 다음 시즌 2011년 말 아메리카컵에서 두 개의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전까지 한 개의 은메달이 전부였던 선배들의 업적을 빠르게 뛰어넘었다. 그리고 2013년 3월 북아메리카컵 2인승 경기에서 처음 우승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파트너는 전정린(강원도청)이었다.


고교 졸업식 당시 친구들과 함께 한 원윤종. 사진제공=올댓스포츠

원윤종. 사진제공=올댓스포츠
2013년 여름부터 파트너가 바뀌었다. 원윤종은 대학교 과 후배인 육상선수 출신 서영우와 호흡을 맞추면서 탄력을 받았다. 2014년 소치올림픽(18위)을 경험하고 2014~2015시즌 세계 톱 10(11위)에 근접한 원윤종은 2015~2016시즌 월드컵 등 주요 대회에서 우승한 끝에 결국 세계랭킹 1위를 찍었다. "처음에는 올림픽만 나간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목표가 생기면서 조금씩 올라갔다." 원윤종은 겸손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봅슬레이를 처음 시작했을 때 강도 높은 훈련도 힘들었지만 84㎏의 몸무게를 100㎏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든 점이었다. 하루에 밥을 15공기씩 먹었고 매일같이 야식도 먹어야 했다. 그러나 원윤종은 이 과정도 근성으로 이겨내며 거구로 재탄생 했다. 강골이긴 했다. 원윤종은 역도선수 출신 석영진과 맞먹는 무게의 바벨을 들 정도로 웨이트 트레이닝도 소홀히하지 않았다.

또 봅슬레이 입문 초기에는 트랙뿐만 아니라 실내훈련장도 없어 아스팔트 위에서 훈련을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보유하고 있던 썰매도 없어 국제대회에 나가면 외국 팀의 연습용 썰매를 빌려 타야 했다. 2010년 11월 미국 유타주 파크시티에서 열린 첫 국제대회 때는 레이스 도중 썰매가 전복돼 트랙의 얼음을 깨뜨려 외국 선수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2년 전에는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2016년 1월, 정신적 지주였던 데니스 말콤 로이드 주행 코치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이별 통보에 원윤종은 심리적으로 많이 흔들릴 수 있었다. 그러나 원윤종은 로이드 코치를 위해 달렸다. 2015~2016시즌 월드컵 4차 대회 동메달 이후 "올시즌 남은 월드컵의 메달을 모두 가져와 달라"는 유언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질주했다. 그리고 캐나다 휘슬러에서 펼쳐진 월드컵 5차 대회에서 아시아 최초로 썰매 종목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로이드 코치의 부인이 대회장에 깜짝 방문하자 선수들과 뒤엉켜 다시 한 번 환희와 슬픔이 뒤섞인 눈물을 흘렸다.


인천체고 시절 서영우. 사진제공=올댓스포츠

인천체고 시절 단거리 코치님과 함께 한 서영우. 사진제공=올댓스포츠

인천체고 졸업식 당시 서영우. 사진제공=올댓스포츠

아버지와 함께 한 서영우. 사진제공=올댓스포츠
원윤종은 바빴다. 선수의 본분도 다해야 했지만 형으로서 역할도 해야 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은 서영우도 잘 다독여야 했다. 서영우는 처음부터 큰 기대를 모았다. 육상선수 출신이라 스피드를 겸비하고 있었다. 과도한 합숙생활에 염증을 느껴 육상선수를 포기했지만 운동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봅슬레이에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변변한 실업팀도 없었다. 결국 2012~2013시즌을 마치고 서영우는 군대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해외 자원봉사로 군 복무를 대신하는 코이카에 지원했다. 현실적으로 봅슬레이는 그만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20대 초반이었는데 마치 인생을 낭비하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잘하는 것도 아닌데 계속 하는 게 맞나 싶었다." 서영우의 솔직한 고백이었다. 이 감독 역시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상황이라 뭐라고 해 줄 말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2013년 11월 아메리카컵에서 국제무대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2013년 12월 국내 최초로 봅슬레이·스켈레톤 실업팀이 강원도청에 창단됐다. 경기도체육회 등에서도 실업팀을 만들 움직임이 보였다. 서영우에게 극적으로 기회가 찾아왔고 2년 뒤 결국 정상에 섰다.

그렇게 원윤종와 서영우는 8년을 기다린 끝에 평창올림픽에 첫발을 뗐다. 지난 18일 펼쳐진 1~2차 시기는 실망, 그 자체였다. 원윤종의 주행 실수로 만족스런 기록을 얻지 못했다. 19일 열린 3~4차 시기에서도 다소 기록을 줄였지만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다. 원윤종과 서영우의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이 눈물은 원윤종과 서영우를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해줄 것이다.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걸…. 평창=김진회 기자 manu35@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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