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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100m. 힘차게 물살을 가른 박태환(27)이 1위로 터치패드를 찍었다. 그제서야 물살 위로 번지는 환한 미소. 나흘간 그를 옥죄던 긴장감과 부담감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관중석에는 박태환을 응원하는 플래카드와 손팻말이 대회 기간 내내 걸려 있었다. 한국과 중국의 팬들이 경기를 마친 박태환을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관중석 가까이 다가온 박태환이 수영모를 던졌다. 열띤 응원에 대한 보답이다. 뜻밖의 선물을 손에 넣은 팬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박태환은 리우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을 겸한 제88회 동아수영대회로 공식 복귀했다. 광주 남부대 국제수영장에서 25일부터 나흘간 한 종목씩 경기를 치렀다. 1500m 우승을 시작으로 주종목인 200m와 400m에 이어 마지막 100m까지 휩쓸며 4관왕에 올랐다. 네 종목 모두 A기준기록을 충족했다. 도핑파문으로 선수자격을 잃었던 18개월간의 공백은 나흘만에 완벽히 복구됐다. 국제 경쟁력을 증명했다는 긍정 평가도 받았다.
대회를 마친 박태환은 후련한 표정으로 인터뷰실에 들어섰다. "개인적으로 기록은 아쉽다"고 운을 떼며 "매 경기 최선을 다해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자는 목표를 세웠는데, 많은 분들의 관심 덕분에 잘 마무리한 것 같다"고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간의 훈련 과정에 대해선 "심리적인 면에서 조금 힘들었다"며 "동아수영대회가 아니라 '동아올림픽대회'라는 압박감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대한체육회의 강경한 입장 표명 이후 스포츠중재재판소(CAS) 제소 등의 법적 대응 가능성도 제기됐다. 박태환은 "회사에서 잘 판단하지 않을까"라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기회도 준비가 돼 있어야 잡을 수 있다"면서 "나는 준비가 돼 있다.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함께 자리한 노민상 감독은 "징계 기간 자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원칙, 규정, 형평성을 존중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지혜를 모아주시길 부탁드린다. 태환이를 꼭 올림픽에 보내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며 큰절을 하기도 했다.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던 박태환도 스승의 절박한 읍소 앞에서는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박태환의 향후 행보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올림픽에 못 나갈 경우 은퇴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박태환은 "서울에 올라가 하루이틀 쉬고 다시 열심히 훈련할 것"이라며 변함 없는 의지를 다졌다. (이하 일문일답)
-대회를 마친 소감은.
오늘 100m까지 힘든 레이스였는데 나름대로 잘 끝낸 것 같다. 많은 분들이 관심 가져주시고 매 시합마다 긍정적으로 봐주셔서 감사드린다. 한 경기 한 경기 최선 다하자는 마음으로 임했다. 기록 면에선 아쉽지만 잘 마무리 한 것 같다.
-대회 도중 대한체육회의 강경한 입장이 전해졌다. 어떤 생각으로 마지막 경기에 임했나.
사실 어떤 얘기인지 전해듣지 못했다. 그 문제에 대해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국민들께 언짢은 일로 많은 충격을 드렸기 때문에 이번 시합을 더 열심히 준비했다. 대회 전에 그 소식(올림픽 출전 불가)을 접했을 땐 당황하고 충격도 받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였고, 거기에만 집중했다. 그게 이번 대회 출전이었다. 매 경기 최선을 다하자는 게 목표를 세웠는데, 내가 할 몫은 다했다고 본다.
-훈련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모든 운동선수들이 힘든 훈련을 한다. 선발전 준비한 모든 선수들이 저 이상으로 열심히 훈련했을 거다. 물론 나도 열심히 했다. 이번 대회에선 올림픽보다 더 큰 목표를 가지고 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압박감도 있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훈련은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지만, 심리적 정신적 고통이 어느 수준 이상을 넘어가면 몸도 아프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회 출전해 좋은 경기를 보여드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해 잘 참고 이겨냈다.
-앞으로 계획은.
또 열심히 훈련해야 한다. 서울 올라가서 하루이틀 휴식기 가지진 뒤 다시 훈련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수영에 대한 생각이 바뀌진 않았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이 들면 진짜 힘들구나 하고 느꼈다. 이제 스물여덟 살인데 예전과 다르다. 내 또래 선수들은 알겠지만, (수영에서) 회복속도나 체력이 무시 못할 요인이다. 다른 선수들보다 회복속도가 빠르고 생각은 하지만, 어린 선수들에 비해선 느릴 수밖에 없다. 열심히 훈련해서 그걸 이겨내려고 노력한다.
-그동안 국가대표 선발전은 훈련의 일환이었는데 이번 대회는 어땠나.
인천아시안게임 전에도 그렇고 매년 국내 대표선발전은 시합보다는 훈련의 과정으로 출전해왔다. 이번에도 똑같이 준비를 하고, 훈련 과정 속에서 경기를 치렀다. 차이가 있다면 심리적인 면이었다. 동아수영대회가 아니라 동아'올림픽'대회라는 압박감을 느꼈다. 경기장에서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시고 해외에서도 와주셔서 감동 받았다. 하지만 기록으로 충족을 못 시켜드리지 않았나 싶다. 그런 아쉬움을 남긴 채 대회를 마치게 돼 죄송스러운 마음도 있다.
-400m 결선 직전 수영복 끈이 끊어지는 당황스러운 순간도 있었는데.
수영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이다. 그 순간 몸이 얼었다. 이 상태로 그냥 경기를 뛰어야 하나, 그러면 수영복이 점점 내려갈 텐데…. 그 순간 고민이 많았다. 비상용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기록을 떠나서 그날은 다른 선수들과 관중들께 죄송스러웠다. 경기가 단 1초라도 지체되면 특혜라는 말이 있을 텐데, 그런 것들이 저에겐 민감한 부분이다. 이 자리를 빌려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기록이 잘 나왔다고 생각은 하지만 관중들과 선수들과 기자분들 기대엔 못 미친 것 같다. 더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리우올림픽에 못 가게 되면 은퇴하는 건 아닌가 하는 관측도 있다.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계속 도전할 생각이 있나.
최선을 다해서 대회를 준비했고, 오늘부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끝난 것 같다. 예전엔 시합 전에 인터뷰를 잠깐씩 해왔다. 이번엔 인천공항 입국 때도 많은 대답을 못해드렸다. 기록으로 보여드린 다음에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주에서 6주 동안 열심히 준비했고, 좋은 기록을 내보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질문도 제 손을 떠난 문제 같다. 모두 제 입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란 걸 알지만 아직은 조심스럽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경기로 다 보여드렸다고 생각한다. 저에 대해 긍정적인 말씀을 해주신 데 감사할 따름이다.
-노민상 감독과 20년째 함께 하고 있는데.
제가 처음 선수로 수영을 배울 때 길을 터주고 인도해주신 분이다.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리는 게 죄송하지만, 제가 가장 힘들 때 손 잡아주시고 구원해주셔서 감사드린다고 말씀 드리고 싶다. 제가 심적으로 힘들 때 잘 넘길 수 있게 해주셔서 좋은 기록이 나올 수 있었다.
-체육회 규정에 대해 법적으로 다퉈볼 계획은 있나.
나는 호주에서 훈련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 바로 광주에 내려와서 그런 문제들은 기사로만 접했다.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지만 회사에서 알아서 판단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선수 본인의 의지가 중요할 텐데.
어떤 상황에서건 기회가 주어지면 그 기회를 잡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준비된 사람이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다. 저는 항상 준비가 돼 있다.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광주=김표향 기자 suza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