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기가 막혔다. 너무 잘 달려서 금메달을 딴게 의심으로 이어질 줄 몰랐다. 주위에선 "당신이 여자가 아닌 것 같다"며 성 정체성 검사를 하자고 했다. 세계육상을 관장하는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이 앞장서서 소녀를 궁지로 몰아갔다. 소녀의 나라 남아공 전체가 들끓었다. 남아공 국민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였다. 인권단체는 흑인여성에대한 인종차별이라며 가만있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09년 당시 18세였던 카스터 세메냐(20·남아공)는 베를린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800m에서 깜짝 우승한 후 여자로서 수치스런 일을 당했다.
국제육상연맹의 의심은 금방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남아공육상연맹은 굴복했고, 세메냐는 성 검사를 받았다. 선수를 보호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코치는 사임했다. 육상연맹은 세메냐가 육상팬들을 속인다고 보지는 않았다. 세메냐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신체 조건을 갖고 불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래서 성 정체성 검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일부에선 세메냐가 남성과 여성을 모두 갖고 있는 양성일 수도 있다는 추측까지 돌았다.
세메냐가 이 논란에서 벗어나는데 11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육상연맹은 검사 결과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면서 세메냐의 경기 출전을 막았다. 외부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거세지자 결국 육상연맹은 지난해 7월 세메냐의 여자 경기 출전을 허락했다. 하지만 검사 결과를 오픈하지 않았다.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는 게 이유였다. 세메냐의 무너진 인권은 온데간데 없었다.
당시 유럽 언론들은 육상연맹이 세메냐의 유전적 변이 가능성을 파고 들었다고 한다. 여자의 성기와 남성의 유전자를 함께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다. 한마디로 자웅동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추측들은 육상연맹이 세메냐의 경기 출전을 허용해 주면서 명확한 설명없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2년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고, 세메냐는 다시 남아공대표팀 유니폼을 입게 됐다. 남아공육상경기연맹은 8일(한국시각) 세메냐가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800m와 1500m에 출전한다고 밝혔다. 800m 2연패에 도전하는 그는 "나는 어떤 역경 속에서도 강하게 성장했다"면서 금메달 뿐 아니라 세계기록(1분53초28·크라토츠비로바, 체코)도 깨트리고 싶다고 했다.
세메냐는 800m 올해 기록 랭킹에서 14위(1분58초61)다. 1위 마리야 사비노파(1분56초95·러시아)에 비해 1초 이상 뒤져 있다. 하지만 세메냐가 2년전 베를린에서 처럼 대구에서도 막판 폭발적인 스퍼트를 뿜어낼 가능성은 충분하다. 세메냐는 베를린에서 2위 제콥스게이(에티오피아)를 2초 이상 따돌리며 독주했다. 세메냐가 너무 잘 달리면 의심하는 목소리가 또 고개를 들 수도 있다.
노주환 기자 nogoo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