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WBC] 야구 묘미 일깨운 日-대만전 명승부

박아람 기자

기사입력 2013-03-11 13:50



WBC 역사상 길이 남을 명승부였다. 아쉬운 것은 명승부의 주체가 대한민국이 아니었다는 것이었을 뿐, 야구의 모든 묘미를 만끽하게 해준 걸작이었다. 3월 8일 금요일 밤 도쿄돔에서 펼쳐진 2013 WBC 일본과 대만의 2라운드 경기는 장장 4시간 37분 동안 최고의 긴박감과 야구의 모든 묘미를 만끽하게 해준 명품 승부로 펼쳐졌다. 비록 대한민국 대표팀의 경기가 아니었지만, 경기를 보는 내내 긴박감을 떨칠 수 없었던 한 편의 드라마였다. 일본과 대만의 명승부를 3부작으로 복기해본다.

1부 : 놀랍게 성장한 대만야구의 힘

대만은 이번 대회를 통해 이전의 WBC에서 보여줬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팀이 되었음을 확실하게 입증시키고 있다. 일본과의 경기에서도 선발로 등판한 왕첸밍은 메이저리그에서 19승을 기록하던 전성기 시절에 못지 않은 구위를 선보이면서 특유의 싱커로 일본 타선을 완벽하게 요리하였다. 물론 여러 차례 실점 위기도 맞이했지만 고비 때마다 땅볼 승부를 유도하면서 일본 타선을 제압하였다. 대만은 일본의 선발투수 노미(한신 타이거즈)를 3회말에 공략하면서 2사 만루의 찬스를 얻었고, 죠 슈지의 밀어내기 볼넷으로 선취점을 얻는다.

이어 대만은 5회말에서도 펑정민의 적시타로 1점을 추가하면서 2-0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한다. 반면에 일본 타자들은 찬스 상황에서도 좀처럼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어딘가에 쫓기는 듯한 위축된 모습이 역력히 드러났다. 일본은 더 이상의 실점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6회부터 라쿠텐의 에이스인 다나카 마사히로를 투입했고, 다나카는 150km를 상회하는 빠른 직구를 앞세워 대만 타자들을 힘으로 압도하며 더 이상의 실점을 허용하지 않는다.

대만 또한 왕첸밍이 6회까지 일본타선을 무실점으로 막고 7회에 왕치엔밍과 궈홍치를 연달아 투입하면서 본격적인 계투작전에 들어간다. 7회말이 종료된 시점에서 대만은 일본에 2-0으로 앞서면서 사상 처음으로 WBC에서 일본을 제압할 절호의 찬스를 맞이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달라진 점은 대만 야수진의 견고함이었다. 결정적인 위기 상황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투혼의 수비를 선보인 대만 내야진은 선발투수 왕첸밍의 호투에 화답했고, 타선도 득점 상황에서 집중력을 발휘하면서 필요한 점수를 뽑아내는 정교함을 선보였다. 더 이상 대만 타선은 예전에 보여진 '모아니면 도'식의 화끈한 스윙으로 일관하는 모습이 아니었고, 상대 투수를 집요하게 공략하는 끈질김의 이미지로 변모하였다.

2부 :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2-0으로 무기력하게 물러날 것처럼 보이던 일본은 8회에서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한다. 7회까지 맥을 못추다가 8회에서 본격적으로 반격을 시도한 대한민국과 대만의 경기와 유사한 양상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7회 2사부터 투입된 궈홍치를 상대로 선두타자 이바타와 우치가와가 연속 안타를 뽑아내면서 무사 1,3루의 결정적인 찬스를 맞이한다. 결국 씨엥창헝 대만 감독은 궈홍치를 마운드에서 내리고 왕칭밍을 올린다. 궈홍치는 한국과의 1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도 2-0으로 앞서던 8회말 구원등판하여 강정호에게 역전 투런홈런을 허용하는 등 팀 패배의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는데, 일본과의 경기에서도 위기를 자초하면서 경기 흐름을 혼전으로 몰고가는 부진한 모습을 보여, 씨엥창헝 감독의 기대를 저버린다.

일본은 결국 아베와 사카모토의 적시타에 힘입어 경기를 원점으로 돌리는데 성공한다. 예전 같았으면 급격히 흔들리며 역전을 허용했을 대만은 흔들리는 구원투수 왕칭밍을 내리고 첸훙원을 투입하면서 더 이상 역전을 허용하지 않고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놀랍게 달라진 대만야구의 집중력은 8회말에 또 다시 위력을 발휘한다. 다나카 마사히로에게 6회와 7회 삼진 4개를 빼앗기며 압도 당한 대만 타선은 선두타자 펑정민이 다나카로부터 첫 안타를 뺏어내며 찬스를 만들고, 4번 린즈셩이 좌측 펜스를 직접 맞히는 큼지막한 2루타를 터뜨리면서 결정적인 찬스를 맞이한다.


일본의 야마모토 감독은 다나카의 구위가 워낙 좋았던 만큼 투수교체를 더 이상 시도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나카는 죠 슈지에게 중전 적시타를 허용하면서 경기는 다시 3-2로 대만의 리드로 바뀐다. 대만은 계속해서 무사 1,3루의 결정적인 찬스를 맞이하면서 추가 득점의 기회를 맞이한다. 다나카를 내리고 마운드에 사와무라를 투입한다. 사와무라가 처음 맞이한 타자 카오친강의 타구는 유격수 사카모토 정면으로 향하는 타구였다. 대만의 3루주자 린즈셩은 런다운에 걸린다. 하지만 사카모토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포수에게 바로 송구를 하지 않고 본인이 린즈셩을 태그하기 위해 직접 홈까지 달려오고, 그 틈을 타서 2루주자는 3루까지, 타자는 2루까지 진루하면서 오히려 더 큰 위기를 자초하게 된다. 무사 1,3루보다 더 점수날 확률이 높은 1사 2,3루의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대만 타선은 더 이상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추가득점에 실패하면서 아쉬움을 남긴다.

8회말 최소 2점은 뽑을 수 있었던 상황에서 1점 밖에 뽑지 못한 대만 타선의 아쉬움은 9회초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1사후 다카시 도리타니가 볼넷으로 진루하면서 일본은 다시 추격의 기회를 마련한다. 하지만 대만 구원투수 첸훙원은 묵직한 구위를 앞세워 히사요시 조노를 중견수 플라이로 잡아내면서 아웃카운트 1개만을 남겨 놓는다. 모두가 대만의 승리로 경기가 마감될 것으로 예상하던 찰나 일본의 야마모토 감독은 결정적인 '신의 한 수'를 던진다. 2사에서 1루주자 다카시가 과감한 2루도루에 성공한 것이다. 대만 포수의 송구도 정확하게 배달되었지만 다카시의 발이 반박자 더 빠르게 2루 베이스에 도달하면서 극적으로 도루에 성공한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과감한 작전에 대만 수비진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2아웃 투 스트라이크 원 볼의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첸훙원은 한복판에 직구를 찔러 넣지만 이바타는 기다렸다는 듯 정확하게 받아치면서 극적인 동점타를 쳐낸다.

불과 1분전만 하더라도 대만의 승리로 마감될 것 같았던 경기는 야마모토 감독의 위험을 감수한 과감한 작전과 이바타의 침착한 배팅, 그리고 대만 배터리의 성급한 승부가 맞물리면서 극적인 상황으로 돌입하게 된다.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진리를 입증한 장면들이 속출하면서 경기는 명승부의 서막에 돌입하게 된다.

3부 : 엇갈린 양팀 감독의 수싸움

9회초에 동점을 허용한 대만은 9회말 공격에서 선두타자 린이추안이 일본의 바뀐 투수 마키타(세이부 라이온즈)로부터 중전안타를 뽑아내면서 또 다시 득점찬스를 맞이한다. 선두타자가 출루하면 어김없이 점수를 뽑아냈던 대만의 공격 흐름을 감안할 때 경기는 대만의 끝내기 승리로 흘러갈듯한 분위기였다. 후속타자 양다이강은 보내기 번트를 시도했으나 공은 투수 앞에 얕게 떠오르는 플라이볼이 되었다. 일본 투수 마키타는 몸을 던져 번트 타구를 다이빙 캐치로 건져내는 투혼을 발휘하면서 선행주자의 진루를 막는데 성공한다. 마키타의 살신성인 수비는 경기의 흐름을 다시 일본 쪽으로 되돌리는 일등공신 역할을 한다.

그러나 대만의 씨엥창헝 감독은 또 다시 보내기 번트를 지시하여 2사 2루 상황을 만들어 놓는다. 후속타자가 타격감이 좋은 펑정민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배터리는 펑정민과의 승부를 거르고 4번 린즈셩과의 승부를 선택한다. 펑정민보다 정교함이 떨어지는 린즈셩과의 승부를 택한 일본 배터리는 린즈셩을 삼진으로 돌려 세우면서 경기 흐름을 확실히 일본 쪽으로 돌려놓는데 성공한다.

일본은 10회초 공격에서 선두타자 아이카와 료지가 안타로 출루하면서 찬스를 맞이한다. 흔들리기 시작한 대만 첸훙원은 제구력 난조를 보이면서 후속타자 이토이 마저 볼넷으로 내보내면서 스스로 위기를 자초한다. 결국 첸훙원은 마운드에서 내려가고 린이하오가 오른다. 사카모토의 보내기 번트로 일본은 1사 2,3루의 찬스를 만들어낸다. 이 상황에서 대만의 배터리는 나카타 쇼와 정면승부를 택하는데, 결국 이 선택은 실패하고 말았다. 타격감이 좋지 않은 나카타를 상대로 얕은 플라이나 땅볼을 유도하려 했지만 나카타는 좌익수 쪽에 깊은 희생 플라이를 만들어내며 일본은 이 경기에서 처음으로 리드를 잡게 된다. 대만은 다시 투수교체를 감행하며 좌완 양야오쉰을 마운드에 올린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였지만 차라리 주자를 모두 채운 다음에 후속타자 좌타자 이나바를 상대로 양아오쉰과 승부하게 하여 병살플레이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승부를 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장면이었다. 한 점 승부로 돌입한 상황에서 대만 코칭스태프는 너무 안일한 승부를 펼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경우 9회말 2사 상황이었지만 펑정민과의 승부를 거르고 린즈셩과의 승부를 선택하여 위기를 넘기는데 성공했는데, 대만 코칭스태프는 1사 2,3루의 실점확률이 높은 상황에서 아무런 방어전략을 취하지 않아 역전을 자초한 것이었다. 경기 후반 양팀 감독의 엇갈린 한수가 극명하게 드러나면서 승부는 일본 쪽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대만은 10회말 반격에서 1사 1,2루의 찬스를 만들어내면서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일본의 구원투수 스기우치(요미우리 자이언츠)는 노련함을 발휘하면서 첸융치를 병살로 처리, 4시간 37분의 기나긴 승부에 방점을 찍는다. 경기를 거의 내줄 것처럼 보였던 일본은 끝까지 승부를 포기하지 않고 집중력을 발휘하는 근성을 보이면서 도쿄돔을 가득 메운 43,527명 관중들에게 잊지못할 명승부를 선사한다.

-에필로그-

비록 아쉽게 경기를 내줬지만 대만은 이제 더 이상 일본과 한국의 들러리가 아님을 확실하게 입증하였다. 만약에 왕첸밍이 한국전 선발로 나왔다면 한국은 더 큰 굴욕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왕첸밍의 호투는 인상적이었다. 또한 점수가 필요한 순간에 집중력을 발휘하는 대만 타선의 모습은 정교함이 한층 더해진 모습이었다.

일본은 이번 WBC에서 역대 최약체 전력으로 평가 받았고, 이전에 펼쳐진 브라질과 중국과의 경기에서도 몇 수 아래로 여겨지던 상대에게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끝까지 경기를 포기하지 않는 집중력을 발휘하면서 일본야구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번 WBC에서 일부 언론은 대한민국의 전력이 베스트가 아니었고 병역혜택 등의 당근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1라운드 탈락에 대해 류중일 감독을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그러나 그 기자가 일본이 경기에 임하는 모습을 보고 과연 그런 논리를 계속해서 펼치게 될지 의문이다. 대한민국도 일본처럼 역대 최약체라는 평가를 들으면서 이번 WBC에 임하였다. 일본은 병역혜택 같은 특별한 환경도 없다. 그들 또한 메이저리그 선수들처럼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대표팀에 참가하는 것이 컨디션 조절에 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대한민국과 일본과의 차이점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바로 승리에 대한 의지와 집중력이었다. 일본과 대만은 4시간 37분의 연장 접전을 펼치면서 단 한 개의 실책도 기록하지 않는 집중력을 보였다. 대한민국은 상식 밖의 실책으로 승부에 스스로 악영향을 미쳤고, 경기에 전혀 몰입하지 못하였다. 또한 귀국하면서 벌어진 국가대표 막내 김상수의 SNS 파문은 이번 대표팀이 얼마나 안일하게 이번 대회에 임하였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하는 부분이었다. 그나마 이승엽, 이대호, 송승준, 윤석민, 오승환 등 일부 주전급 선수들의 투혼이 있었기에 2승 1패로 마무리하고 대회를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 고참급 선수들의 투혼을 팀 분위기에 결속시키지 못하고 경기의 흐름과 규정마저도 짚지 못한 류중일 감독의 무능한 리더십은 반드시 비판받아야 할 부분일 것이다.

야구의 묘미를 만끽하게 해준 일본과 대만의 경기를 보면서 앞으로 국내 프로야구 리그가 어떤 자세로 경기에 임해야 하는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KBO에서는 매년 신인선수들을 대상으로 워크샵을 실시할 때마다 이번 WBC 일본과 대만의 경기 모습을 보여주면서 야구에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시청각 교육을 시켜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양형진 객원기자, 나루세의 dailyBB (不老句)(http://dailybb.tistory.com/)>

※객원기자는 이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위해 스포츠조선닷컴이 섭외한 파워블로거입니다. 객원기자의 기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 당신이 좋아할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