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노트] 美애리조나 트라이아웃 풍경
기사입력 2000년 02월 20일 14시 02분
토를 달지 않아도 미국은 야구천국이다. 비시즌인데 불구하고 메이저리그 전지훈련이 열리고 있는 플로리다와 애리조나는 벌써부터 야구열풍이 뜨겁다.
삼성과 한화가 전지훈련을 하고 있는 피어리아구장도 지난 20일(한국시간) 샌디에이고와 시애틀의 스프링캠프 개막에 맞춰 팬들의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젊은 연인들, 철없은 아이들까지 수백명이 정규구장 크기의 그라운드 10면을 구석구석 누비며 먼발치에서만 봤던 메이저리그 스타들을 지켜보며 아는체도 해보고, 쭈뼛쭈뼛 말을 걸어보기도 한다.
수개월 동안 먼지에 묻혔던 전지훈련장내 상품코너와 훈련장 밖의 놀이시설도 오랜만의 손님맞이에 정신이 없다. 시즌이 끝나면 야구를 아예 잊고 사는 국내 현실과 비교하면 부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야구가 생활이고 생활이 곧 야구인 미국이지만 언제나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내와 마찬가지로 무명선수의 애환은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스프링캠프에 맞춰 시작된 샌디에이고의 트라이아웃(기량테스트)에 참가한 전국 각지의 무명선수들은 팬들의 환한 표정과 달리 시종일관 굳은 표정이었다. 따라온 가족들의 얼굴도 비장하기 그지없다. 옆사람이 말을 걸어도 시선은 그라운드에 고정된채 듣는둥 마는둥이다.
오로지 내 남편이, 내 아들이, 내 아빠가 샌디에이고의 코칭스태프와 스카우트의 눈에 들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밖에 없다. 심사위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선 자그마한 행동도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그라운드에 나서기 직전 자신의 프로필이 적힌 서류를 건네줄 때도 두손으로 공손하게 전달하고, 돌아설 땐 `탱큐'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이 순간만큼은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예의와 공손함이 물씬 풍긴다.
더욱이 투수가 안타를 맞거나, 타자가 삼진을 당하고 물러설 때 `메이저리그의 꿈은 물건너갔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인채 쓸쓸히 걸어나오는 뒷모습은 `야구천국'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남의 슬픔이 나의 행복'이라는 생존경쟁의 법칙 만큼은 동서양이 따로 없는 것 같다.
[피닉스(미 애리조나)＝권정식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