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리맨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업계의 화제가 된바 있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카피처럼 현대카드는 남다른 감성문화 마케팅을 앞세워 승승장구해 왔다. 공시자료에 따르면 현대카드는 매년 평균 2000억원 가까운 순이익을 내고 있다. 독특한 감성 광고와 다양한 문화공연은 현대카드만의 마니아층을 형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고객들에게 복고감성을 직접 전달하고자 기획한 중고 LP(레코드판, 바이닐)판매점 '바이닐&플라스틱'이 '대기업의 골목상권 침해' 논란에 휩싸이며 상인들과 극한 대립을 벌이고 있다.
바이닐&플라스틱은 현대카드가 지난달 10일 만든 대형 음반매장으로 LP 약 4000종과 음악 CD 8000여종을 보유하고 있다. 1~2층에 걸쳐 휴게공간과 무료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도 갖췄다.
상인들은 "LP 매장도 일종의 '골목상권'"이라며 "개인이 운영하는 영세 LP매장이 거대 대기업과 경쟁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항변했다. 집회를 주도한 전국음반소매상연합회 김지윤 회장(LP LOVE 대표)은 "LP 문화는 소수의 마니아 상인들이 명맥을 이어온 일종의 '서브컬처(하위문화)'"라며 "근근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LP시장에 대기업이 진출해 막대한 자본으로 문화 생산과 유통·판매까지 싹쓸이하면 문화의 다양성은 순식간에 없어지고 말 것"이라고 밝혔다.
케이블TV에서 방영한 1980~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등 최근 복고 열풍이 불며 LP가 주목받음에 따라 돈벌이가 될 것 같으니까 대기업이 숟가락을 얹으려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시위에 나선 상인들은 이 같은 현대카드 측의 답변에 말도 안 되는 핑계라는 주장이다. 김지윤 회장은 "현대카드는 바이닐&플라스틱에서 새 앨범뿐만 아니라 중고 LP도 판매하고 있다"며 "심지어 카드결제 시 20% 할인혜택까지 주는 등 적극인 판촉에 나서고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영세상인들을 돕는 '문화지원'이 될 수 있냐"고 강조했다. 연합회 측은 LP 매장이 전국에 50~60개만 남을 정도로 쇠락한 상황에서 바이닐&플라스틱 오픈이 들어섬에 불과 1개월도 안됐는데 매출이 반 토막 난 가게가 부지기수라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 현대카드는 스트리밍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에게 음악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체험형' 공간을 제공하고자 바이닐&플라스틱을 오픈했다고 밝혔다. 젊은 세대들에게 LP를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구매하는 재미를 느끼게 함으로써 음반문화 저변 확산에 기여한다는 것.
논란이 커지자 현대카드는 지난 1일부터 중고 LP 판매를 중단하고, 현대카드 결제 시 할인혜택도 오는 19일부터 20%에서 10%로 축소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전국 음반판매점 소개 지도를 제작해 배포하고, 개별 음반판매점 홍보 리플렛 제작과 저변 확대를 위한 인디 및 유명 뮤지션의 LP제작을 지원하겠다는 정책대안을 내왔다.
하지만 연합회 측은 현대카드가 LP사업에서 완전 철수할 때까지 매일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바이닐&플라스틱 매장 앞에서 릴레이 시위를 벌인다는 방침이다.
김지윤 회장은 "현대카드가 내놓은 5가지 정책대안은 '우는 아이 떡 하나 준다'는 식으로 상인들을 우롱하는 처사"라며 "상인들이 시위에 나선 것은 중고 LP 판매자들만을 위한 행동이 아닌 국내 음반시장 전체가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일부 시민들이 할인혜택이나 LP시장 확대 등 현대카드측이 제시한 당근에 흔들리고 있지만 대기업들이 시장 초기 어떻게 영세업자들을 몰아냈고, 이후 시장을 독점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의 LP사랑이 깊고, 직접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중소 LP판매점들을 소개하는 등 홍보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이에 대해 상인들은 "정태영 부회장을 매장에서 본 적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LP시장을 사랑한다면 왜 바이닐&플라스틱을 오픈하기 전에 기존 업자의 의견을 청취하거나 논의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이런 이야기조차 현대카드 측이 흘린 미담이 아닌지 의혹이 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대카드 측은 기존 상인들과 상생을 말하고, 기존 상인들은 현대카드의 철수를 요구하고 있어 LP시장을 놓고 벌이는 '골목상권 침해'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규복 기자 kblee341@sportschosun.com
|
- Copyrightsⓒ 스포츠조선,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