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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사태 전두환·노태우가 주도한 '쿠데타'…36년 전 그 날 무슨 일이?

김준석 기자

기사입력 2015-12-11 13:56 | 최종수정 2015-12-12 12:10



1212사태 주역들이 군사반란을 성공한 뒤 찍은 기념사진.

1212사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장성 시절 주도한

1212사태가 벌어진 지 오늘로 36년이 흘렀다.

훗날 군사반란으로 규정된

1212사태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한 사건이다.

전두환 소장은

1212사태 이후 518 광주민주화 운동 등 일련의 사태를 일으킨 뒤 이듬해 9월 대통령에 올랐다.

이 때문에 시작으로부터 장장 9개월, 세계에서 유래가 없이 가장 오래걸린 쿠데타란 평가를 받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그 해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로 맞은 국가 권력 공백 상태에서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소장이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를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되고 실권을 쥔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과 마찰을 빚으면서 시작됐다.

군부내 사조직 '하나회'의 리더였던 전두환 소장은 합동수사본부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국내 정보를 독점하고 정부 부처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 등 월권을 행사했다.

전두화 소장의 권력욕에 위협을 느낀 정승화 총장과 12월13일 개각 이후 전두환 소장 등 하나회 핵심 멤버들을 전출하거나 예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눈치챈 전두환 소장은 11월부터 비밀리에 진행하던 정승화 체포 작전을 구체화 했다.

정승화 총장은 10.26 사건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초대를 받아 시해 장소인 궁정동 안가에 함께 있었고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받아 왔다.

전두환 소장 측은 이를 내란 방조 혐의로 보고 1월 중순부터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웠고 하나회를 비롯한 동조 세력 규합에 나섰다.

허화평 보안사령부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령부 수사과장, 장세동 제30경비단장, 김진영 제33경비단장 등 영관급 후배의 동조를 얻어 모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11월 말 경 전두환은 황영시 제1군단장, 노태우 제9사단장, 백운택 제71방위사단장,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1, 3, 5공수여단장 등 선후배 동료 장성과 거사를 협의했다. 12월 8일 전두환은 이학봉 중령으로부터 정승화 총장은 일과시간 후 총장 공관에서 연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첨부된 세부계획서를 전달 받고, 이를 확정한 후 허삼수와 우경윤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3]

12월12일 오후, 전두환은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차규헌, 노태우, 황영시 등 규합한 동조세력을 장세동이 있던 경복궁 내 수도경비사령부 여하 제30경비단 단장실로 모이도록 한 후 시내 일원을 장악하기로 한 계획을 지시, 논의했다.

같은 날 18시,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육군참모총장 체포안에 대한 재가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와 동시에,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 우경윤은 정승화 총장 연행계획을 진행했다. 19시, 이들은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50명을 투입했다. 33헌병대 병력은 공관을 경비하던 해병대 병력을 제압하고 공관에 난입했다.[4] 19시 21분, 반란군은 정총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했다. 21시 30분경, 전두환, 유학성, 황영시 등은 다시 국무총리공관으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집단으로 정 총장의 연행 · 조사를 재가해 달라고 재차 요구하였으나 다시 거절당했다.

이후, 신군부 세력은 총장의 강제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복귀를 주장하던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 등에 대해 하극상을 감행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연행했다. 하나회 회원이던 박희도 준장이 이끄는 제1공수특전여단 병력과 최세창 준장이 지휘하던 3공수특전여단, 그리고 장기오 준장의 제5공수특전여단이 서울로 출동했다. 또한 노태우 소장은 자신의 지휘관이던 9사단 29연대를 중앙청 앞에 집결시켰다.

1공수여단은 행주대교에 있던 30사단 병력을 무력화시킨 후 곧장 서울로 달려갔다. 얼마 후, 1공수여단은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공격, 국방부 50헌병대 경비병력으로 근무하던 정선엽 병장을 사살하고 후 국군 수뇌부를 체포했다. 그리고 국방부 청사에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찾은 후 최규하 대통령에게 끌고갔다. 한편 3공수여단은 부대 영내에 있던 특전사령부를 완전히 장악,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을 사살하고,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체포하였다.

결국 전두환의 의도대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에게는 세 차례 걸쳐 10시간 만인 13일 새벽 5시, 사후 재가가 이루어졌다. 12월 13일 오후,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담화문을 통해 10.26 사건 연류 혐의로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고 이와 연관된 일부 장성 또한 구속됐으며, 정승화의 육군참모총장과 계엄사령관직에 이희성 육군 대장이 임명되었음을 발표했다. 12.12 사건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사실상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을 직접 임명하고 6인 위원회를 통해 군부의 인사를 조정하여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권력 공백기에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1212사태로 군부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했다. 이후 1980년 5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사실상 장악했고, 5·17 쿠데타에 항거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강경진압했다.

전두환은 8월 22일에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고 1980년 9월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됐다. <스포츠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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