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신용평가사들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17일 국내 3대 신용평가사인 한국신용평가, 한국기업평가, 나이스신용평가에 중징계 방침을 통보했다. 이들 신용평가사들이 평가 대상인 기업들과 우호적 관계를 통해 신용평가 수주를 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신용 평가의 독립성과 신뢰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실제로 신용평가사들이 기업의 신용등급 강등을 회사채 발행 이후로 연기시켜주는 등의 편법을 쓰기도 했다. 신용평가사를 믿고 투자한 투자자들만 막대한 손실을 입은 셈이다.
이에 금감원은 7월 중 제재심의위원회를 열고 신용평가사들에 대한 제재 수위를 확정할 방침이다. 우선은 지난 13일 3대 신용평가사와 임직원들에게 '기관경고'와 '문책경고' 이상의 중징계 방침을 통보했다.
금융감독원 측은 동양그룹 사태 당시 신용평가사들이 동양이 회사채 발행을 포기한 시점, 오리온이 지원을 거부한 시점 등에서 충분히 동양그룹 계열사들의 신용등급을 조정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고, 법정관리 신청 이후에 신용등급을 강등시켰다고 판단하고 있다.
신용평가사들에 대한 의심은 동양그룹 사태 때 불거진 문제가 아니었다. LIG건설 CP발행 사건, 웅진그룹 CP 발행 사건에서도 신용평가사들의 부실 평가가 있었던 거 아니냐는 지적이 끊이질 않았다. 그만큼 시장에선
국내 신용평가사들에 대한 신뢰가 낮았다.
실제로 CEO스코어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의 신용등급에 대해 국내 신용평가사와 국제신용평가사의 시각 차이가 큰 것으로 조사됐다. 100대기업 중 국내와 해외신용평가사에서 평가를 받은 33개 기업의 평균 등급에서 큰 차이가 발생했다.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33개 대기업에 대해 평균 'AA+' 등급을 매겼지만 무디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피치 등의 해외 3대 신용평가사들은 평균 'A-' 등급이라 평가했다. 22단계 신용등급표에 따라 최상등급 'AAA'를 수치화해 1이라고 하면 국내평가사는 국내 대기업을 1.6등급, 해외 평가사들은 6.8등급을 매긴 셈이다. 같은 회사를 평가했음에도 무려 5.2등급이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국내와 해외 평가사들의 단순한 시각차이라고 하기에는 그 차이가 너무 크다.
심지어 GS칼텍스는 국내에서는 2등급인 AA+ 등급이지만, 무디스와 S&P에서는 10등급인 Baa3과 BBB-를 받았다. 무려 8등급 차이가 난다. 이 외에도 현대자동차, LG전자, 에쓰오일, 롯데쇼핑, SK하이닉스, 현대제철 등이 국내에선 'AAA'(1등급)부터 'A+'(5등급)을 받았지만, 해외에선 'BBB+'(8등급)부터 'Ba2'(12등급)의 7등급이나 낮게 평가됐다.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 KT, SK텔레콤, SK종합화학, 이마트, 포스코건설, SK E&S 등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런 차이에 대해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채무상환 능력 평가에서 대기업 집단의 계열사 지원 등의 한국 재벌 문화에 대한 특수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국내 신용평가사들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신용평가사들의 주 수입원이 기업들의 평가 수수료이기 때문에 기업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 금감원은 이런 점이 신용평가사의 기업 봐주기 관행으로 이어졌고, 뒷거래까지 생겨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결국 국내 신용평가사들 스스로 자신들의 평가와 등급에 대한 신뢰를 버린 셈이다.
이런 따가운 시선 때문인지, 한국기업평가는 지난 11일 포스코의 신용등급을 'AAA'에서 'AA+'(안정적)으로 한 단계 강등시켰다. 포스코는 1994년 'AAA'등급을 받은 후 20년 만에 처음으로 신용등급 강등이란 날벼락을 맞았다. 또 이달 초 한국기업평가와 한국신용평가가 KT의 AAA등급을 각각 '긍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하기도 했다.
당장 시장에선 금감원의 제재가 어떻게 확정될 지 기다리고 있지만, 투자자들의 신용평가사들에 대한 소송이 제기될 가능성이 높은 상태다. 또한 신뢰를 잃은 신용평가사들에 대해서도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박종권 기자 jkp@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