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있어도 포기란 없다."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문구다. 이병철 고 삼성그룹 창업주가 그랬고, 정주영 고 현대그룹 창업주도 그랬다.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반드시 성장할 수 있다는 거다. '칠전팔기' 정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렇다 보니 포기란 단어 자체를 병적으로 싫어한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선 포기도 기술이 됐다. 포기가 만들어 낸 미학. 더 큰 성공을 위한 새로운 도전이다.
그러나 이젠 변했다. 포기가 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것도 잘 되는 사업일수록 포기를 해야 더 큰 효과를 얻는 시기가 도래했다. 이은복 LG경제연구소 연구원은 'SMART EXIT'란 보고서를 통해 "기업이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신성장 사업을 찾는 것 못지않게 앞으로 하지 않아야 할 사업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례는 있다. 국가대표 장수기업 두산그룹이다. 두산이 거둔 지난해 매출은 25조원. 두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 두산건설이 주축이 됐다. 여기에서 주목할 게 있다. 두산은 당초 주류회사로 출발했다는 점이다. 90년대까지도 그랬다. OB맥주가 그룹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런데 두산은 돌연 1996년 그룹의 알짜사업인 OB맥주 사업 포기를 선언했다. 1997년엔 주류사업부문을 통째로 팔아치웠다. 주위의 반응은 좋지 못했다. 알짜사업을 포기한 CEO의 경영자질이 도마 위에 올랐다. 박용만 회장(당시 부회장)이 중심에 서 변신을 진두지휘 했다. 그런데 웬걸. 10년이 지난 이후 평가는 180도 바뀌었다. 든든한 실탄을 바탕으로 중공업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변신은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두산은 2000년 이후 연평균 22% 매출 증가율을 기록하는 종합중공업 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IBM은 2005년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산업을 매각을 통해 확보한 실탄을 소프트웨어와 서비스 사업 투자를 통해 5년 사이 주가를 2배 이상 끌어 올렸다.
최근 하이닉스 인수를 통해 신성장 동력을 확보한 SK그룹. 성공적인 M&A가 이뤄질 수 있었던 배경엔 계열사의 사업 포기가 주요했다. 그룹 내 자금유동성 확보에 큰 도움이 됐다. 매각 자금과 함께 누적적자를 사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SK그룹은 올해에만 SK가스의 해양심층수 사업, SK텔레시스 휴대전화 사업, SK커뮤니케이션즈의 게임 자회사를 매각한 바 있다.
SK그룹 관계자는 "현재보다 미래를 위해 잘 할 수 있는 사업에 집중을 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조직원과 소통 관건
CEO들은 일반적으로 사업 포기를 실패로 받아들이다. 포기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급변하는 시대에는 포기도 기술이다. 사업을 더 잘 하기 위한 전략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단, 조건은 있다. CEO의 리더십과 조직원과의 소통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다. 조직원과 소통 없는 포기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또 충분한 사전 검토와 향후 미래비전의 대입을 통한 결과를 따져봐야 한다. 이은복 LG경제연구소 연구원은 "기업의 성장동력 활성화 방안과 맞물려 어떻게 기동성을 확보할지에 대한 계획이 동시에 이뤄질 때 기업의 지속성장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세형 기자 fax123@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