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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크루이프가 남긴 축구에 남긴 '진한' 발자취

이건 기자

기사입력 2016-03-25 06:23


암스테르담 올림픽스타디움 앞 크루이프 동상에 놓인 꽃들. ⓒAFPBBNews = News1

[런던(영국)=이건 스포츠조선닷컴 기자]

"우리는 언제나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FC바르셀로나)

"천재는 떠났다. 하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영원할 것이다."(후안 마타)

"오늘은 축구계에서 가장 슬픈 날이 될 것 같다. 더 이상 그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게 슬프다."(울리 슈틸리케)

애도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찬사도 이어졌다. 업적과 찬사를 뒤로 하고 떠난 그. '플라잉 더치맨', '크루이프턴' 요한 크루이프가 사망했다. 지난해 1월 폐암 선고를 받았다. 병마와 싸웠다. 결국 이기지 못하고 고인이 됐다.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폐암과의 대결에서 2-0으로 앞서있다"고 말한 그였기에 사망 소식은 더욱 충격적이다.

요한 크루이프는 현대 축구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선수로서 그리고 감독으로서 또한 이후의 삶에서도 그의 영향은 대단했다. 크루이프가 남긴 족적을 따라가봤다.


1972년 6월 3일. 유러피언컵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요한 크루이프(오른쪽) ⓒAFPBBNews = News1
5관왕

1972년 크루이프는 아약스의 5관왕을 이끌었다. 국내리그인 에레데비지에, KNVB컵, 유러피언컵(유럽챔피언스리그 전신)을 석권해 트레블을 이뤘다. 여기에 UEFA슈퍼컵과 인터컨티넨털컵(클럽월드컵 전신) 우승까지 더했다.


1964년 아약스에서 프로에 데뷔한지 8시즌만에 일군 대성과였다. 그의 뒤에는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있었다. 1965년 미헬스 감독과 만난 크루이프. 그때까지만해도 그는 '게으른 천재'였다. 경기 중에도 담배를 피워대는 골초였다. 그런 그에게 미헬스 감독은 '토탈사커'를 제시했다. 다른 선수들은 알지 못했다. 다들 '체력 부담'을 걱정했다. 하지만 크루이프는 달랐다. "위치선정만 잘하면 체력도 아끼고 승리고 거머쥘 수 있는 최고의 전술"이라고 했다. 미헬스 감독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미헬스 감독과는 1971년까지 함께 했다. 그 사이 크루이프는 네덜란드와 유럽 무대를 평정했다. 5관왕을 차지하던 1971~1972시즌 미헬스 감독은 아약스를 떠나있었다. 그럼에도 미헬스 감독의 야전사령관 크루이프는 맹활약하며 5관왕을 이끌었다.


바르셀로나 시절 크루이프(왼쪽) ⓒAFPBBNews = News1
5대0

1973년 여름 크루이프는 아약스를 떠났다. 그리고 스승 미헬스 감독이 있는 바르셀로나로 왔다. 사실 레알 마드리드가 크루이프 영입에 공을 들였다. 하지만 크루이프는 당시 스페인 독재자였던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경멸하고 있었다. 프랑코가 지원을 아끼지 않는 레알 마드리드로 갈 이유가 없었다.

바르셀로나에 온 크루이프는 역사적인 경기를 치렀다. 바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레알 마드리드와의 엘 클라시코 원정이었다. 바르셀로나는 크루이프의 맹활약 속에 레알 마드리드를 5대0으로 눌렀다. 그 시즌 바르셀로나는 1959~1960시즌 이후 14년만에 리그 우승을 거뒀다

크루이프턴

현재는 너무나도 많은 선수들이 쓰고 있는 기술이다. 볼을 발 뒤로 빼내서 상대를 제치는 것. 크루이프가 제일 처음 썼다. 종종 써왔던 기술로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974년 서독월드컵에서 스웨덴을 상대할 때였다. 당시 볼을 받은 크루이프는 크로스를 올리는 척하면서 볼을 뒤로 뺐고 그대로 전진해 서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렸다.

크루이프턴
1974년 서독월드컵

서독월드컵 직전 크루이프는 세계 최고의 선수였다. 이미 발롱도르를 2번이나 들어올렸다. 남은 것은 월드컵 우승 트로피밖에 없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네덜란드를 맡은 미헬스 감독은 크루이프를 비롯해 피트 카이저, 아리에 한, 요한 네스켄스 등 자신의 전술을 극대화할 선수들로 팀을 구성했다.

네덜란드는 1차예선에서 2승1무를 거두며 조1위로 2라운드에 진출했다. 2라운드에서도 거칠 것이 없었다. 아르헨티나를 4대0, 동독을 2대0으로 눌렀다. 마지막 상대인 브라질마저도 2대0으로 누르며 결승에 올랐다.

결승 상대는 개최국인 서독. 네덜란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서독마저 잡아먹을 기세였다.


베켄바우어(왼쪽)와 크루이프(가운데)가 펼친 1974년 서독월드컵 결승전. ⓒAFPBBNews = News1
하지만 서독에는 크루이프에 대적할만한 선수가 있었다. 프란츠 베켄바우어. 그는 결승전에서 크루이프를 밀착 마크했다. 결국 크루이프는 고전했고 네덜란드는 1대2로 졌다. 물론 그해 발롱도르는 크루이프가 차지했다. 마지막 위로였다.

이 경기는 크루이프의 마지막 월드컵이었다. 크루이프는 네덜란드를 19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 본선에 진출시켰다. 하지만 정작 본선에 자신은 나가지 않았다. 당초 독재국가 아르헨티나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뛰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2008년 스페인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크루이프는 "나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납치당한 적이 있었다. 그 충격으로 월드컵에 참가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 대회에서 네덜란드는 다시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다.


아들 요르디 크루이프와 함께. ⓒAFPBBNews = News1
감독 크루이프

이후 크루이프는 미국에서 뛰었다. 그리고 1981년 아약스에 돌아왔다. 2시즌을 뛴 뒤 1983~1984시즌 페예노르트에서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리고 은퇴 선언.

은퇴와 동시에 크루이프는 아약스 유소년팀을 맡았다. 로날드 데부어, 프랑크 데부어, 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시도로프 등을 길러냈다. 미헬스 감독의 토탈사커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1985~1986시즌 크루이프는 아약스의 정식 감독이 됐다. 그 시즌 KNVB컵을 우승했다. 다음 시즌에도 KNVB컵 2연패를 달성했다. 동시에 UEFA 컵위너스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1988~1989시즌 크루이프는 바르셀로나로 옮겼다. 물론 감독이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크루이프는 바르셀로나 리빌딩에 들어갔다. 미카엘 라우드럽과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로날드 쿠만, 펩 과르디올라, 호마리우, 게오르게 하지 등 드림팀을 구성했다. 1990~1991시즌을 시작으로 프리메라리가 4연속 우승의 신화를 썼다. 1991~1992시즌에는 유러피언컵을 차지하기도 했다.

8시즌동안 리그 4회, 코파델레이 1회 우승을 일궜다. 유러피언컵에서도 1차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컵위너스컵 1회 우승도 있다.


ⓒAFPBBNews = News1
유산

크루이프는 1995~1996시즌 리그 우승에 실패했다. 그 책임을 지고 바르셀로나 감독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약스와 바르셀로나의 고문으로 재직했다. 크루이프가 남긴 유산은 대단하다. 가장 큰 것이 바르셀로나의 유소년 육성 시스템이다. 크루이프가 아약스를 본받아 현재의 유스시스템을 정비했다. 또한 전세계에 토탈사커를 전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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