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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의 발품인터뷰]'광주 주장' 박병주, 바르셀로나서 '맨땅에 헤딩'

이건 기자

기사입력 2016-03-20 08:05


바르셀로나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있는 박병주가 포즈를 취했다. 사진제공=박병주

[바르셀로나(스페인)=이건 스포츠조선닷컴 기자]그는 K리그 최고 수준의 센터백이었다. 빠른 스피드, 제공권, 수비센스까지 좋았다. 중국과 중동 클럽들이 그를 원했다. 하지만 의리를 선택했다. 그리고 부상이 왔다. 재활도 소용없었다. 그러기를 2년. 타의로 은퇴할 수 밖에 없었다. 축구를 보기도 싫었다. 그리고 떠났다. 그러기를 10개월. 새 도전은 서서히 빛을 보고 있다. 얼굴에 있던 그늘도 사라졌다. K리그 축구 선수 출신 1호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으로서 새 삶에 만족하고 있다. 박병주(31)를 바르셀로나 '별루이하우스'에서 만났다

전성시대 그리고 부상과 절망

박병주는 성실한 센터백이다. 울산 출신인 그는 고교시절 청구고의 '무적시대'를 이끌었다. 맨 뒤에는 그가 최전방에는 박주영(31·서울)이 있었다. 함께 브라질 유학도 다녀왔다. 단국대에서도 수비진의 중심이었다. 대학 1학년시절 20세이하 대표팀 상비군, 4학년때는 대학선발로도 뛰었다. 많은 팀들이 그를 원했다.

2008년 성남에 입단했다. 하지만 주전 경쟁에서 밀렸다. 김영철, 조병국, 김상식 등이 버티고 있었다. 눈물젖은 2군 생활을 했다. 그리고 2010년 기회가 왔다. 그해 12월 광주가 창단했다. 창단 멤버로 자리를 옮겼다.

팀의 중심 수비수로서 자리매김했다. 23경기에 출전했다. 창단 첫해 광주는 16개팀 가운데 11위를 차지했다. 대구, 인천, 상주, 대전, 강원을 넘어섰다. 30경기에서 43실점밖에 하지 않았다. 수준급 수비가 빛났다.

그러자 제주에서 오퍼가 왔다. 광주에 남고 싶었다. 자신의 연봉을 깎아서라도 남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단장은 박병주의 몸값이 높아지자 제주로 이적시켜버렸다.

제주에서 박병주는 탄탄한 수비력을 과시했다. 홍정호(27·아우크스부르크)와 함께 중앙수비라인을 이끌었다. 좋은 기량을 선보이자 해외에서 러브콜이 왔다. 중국과 중동이었다. 더 많은 돈을 거머쥘 수 있는 기회였다. 이때 친정팀인 광주에서 연락이 왔다.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도 의리를 택할 수 밖에 없었어요."


마음의 빚을 풀고 싶었다. 2012년 박병주가 제주로 떠나자 광주의 수비진은 크게 흔들렸다. 결국 광주는 2부리그인 챌린지로 강등됐다. 클래식에서 챌린지로의 이적이었다. 주장 완장도 달았다. 여기서 잘해 승격을 일구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다시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2013년 광주 시절 박병주. 사진제공=프로축구연맹
운명의 시계바늘은 거꾸로 흘렀다. 4경기를 나섰다. 그리고는 갑자기 쓰러졌다. 오른쪽 정강이가 부러졌다. 그동안 큰 부상이 없던 박병주였다. 하지만 계속된 훈련에 피로가 누적됐다. 결국 탈이 난 것. 부러진 정강이는 좀처럼 붙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을 보냈다. 결국 2014년 여름 방출됐다. 절망은 컸다. 다시 재기하려고 몸부림도 쳤다. 동남아리그의 문도 두드렸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축구가 미웠다. 아니 정확하게는 축구밖에 모르는 자신이 미웠다. 무엇을 할지 몰랐다. 간단한 일도 할 줄 몰랐다. 팀에 있을 때는 주무가 해줬던 일들이었다. 그렇게 절망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가족과 이야기를 나눴다. "떠나자." 답을 내렸다.

새로운 도전

새로운 일을 도전하기로 했다. 축구와 전혀 관련없는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바르셀로나 이야기가 나왔다. 가족들과 떠났던 바르셀로나가 눈에 선했다. 게스트하우스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냥 결정만 할 뿐이었다.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서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지금 자리에 있는 예전 게스트하우스를 인수했다.

"사실 많은 돈이 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위험천만한 일이지요. 사기일 수도 있잖아요. 정말 아무것도 몰랐기에 겁없이 모든 것을 진행했어요.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2015년 5월 바르셀로나로 넘어왔다. 딸 '한별' 양과 아들 '루이'군의 이름을 따서 '별루이 하우스'라고 이름지었다. 처음에는 좌충우돌이었다. 초짜 티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성실함으로 임했다. 아내의 식사 준비를 도왔다. 청소는 자신이 직접 했다. 학원에도 나갔다. 하루에 8시간씩 스페인어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다보니 체계가 잡혔다

큰 욕심을 내지 않았다. 보통 성수기에는 한 방에 2층 침대 4~5개를 놓는 경우가 많다. 박리다매를 노리는 것이다. 하지만 박병주는 그러지 않았다. 1인실과 2인실, 3인실만을 운영했다. 조금 손님이 적더라도 최고의 퀄러티를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었다. 청결함은 기본이다. 정결하면서도 푸짐한 아침식사도 제공한다. 손님들이 궁금한 것이 있을 때는 SNS를 통해 해답을 빨리 알려주는 것도 하나의 서비스 전략이었다. 진심은 통했다. 별루이하우스는 바르셀로나에서 잘나가는 게스트하우스가 됐다.


박병주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치유 그리고 한국축구

박병주는 "게스트하우스를 하면서 어느 정도 마음이 치유됐어요"라고 했다. 자신을 절망에 빠트린 축구였지만, 일을 하면서 축구 덕을 많이 본 것.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와 '축구'의 도시다. 별루이하우스에서 지냈던 손님 가운데 축구팬들이 많았다. 사장님이 광주의 주장이라는 입소문이 났다. 축구팬들의 요람이 돼버렸다. 한국에서도 연락이 자주 온다. 몇몇 지도자들은 박병주에게 영입 검토 외국인 선수에 대한 검증을 부탁하기도 했다.

"결국 이 일을 하면서도 내가 축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라고 말한 그는 "이제 다시 축구도 생각하려고요"라고 했다. 첫 걸음은 '유럽축구연맹 지도자 자격증'이다. 영국에서 이 과정을 취득한 지도자들은 꽤 있다. 하지만 스페인에서 취득한 사람은 없다. 스페인이 유소년 육성의 천국인만큼 이 과정 이수는 의미있는 일이다. 박병주는 "유럽에 나와있는 것이 어찌보면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서른 한살이면 아직 젊은거잖아요. 다시 도전해보렵니다"고 했다. 그는 "결국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거든요. 바르셀로나에서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시작할 겁니다"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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