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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퍼거슨 전 맨유 감독은 "지(Ji)는 볼이 필요없다"고 했다.
수원월드컵경기장에는 박지성의 혼이 담겨 있다. 그의 이름 석자가 세상에 나온 2002년 한-일월드컵이었다. 히딩크호는 2002년 4강 신화의 문을 열기 전 수원에서 프랑스와 마지막 평가전을 치렀다. 2002년 5월 26일이었다. 21세의 박지성은 전반 26분 동점골을 터트리며 확고부동한 주전으로 뿌리내렸다. 신화의 서곡이었다.
2003년 수원은 또 다른 기회의 무대였다. 2002년 한-일월드컵 후 거스 히딩크 감독은 PSV의 지휘봉을 잡았고, 박지성을 영입했다. 그러나 고행이었다. 부상과 부진의 덫에 걸렸다. 그가 볼을 잡으면 PSV의 홈팬들은 야유를 보냈다. 설 곳이 없었다. 유턴도 생각했다. 수원에서 비로소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2003년 7월 20일, 피스컵이었다. 그는 홍 감독이 포진한 LA갤럭시전에서 선제골을 터트리며 팀의 4대1 대승을 이끌었다. 피스컵을 시작으로 2003~2004시즌 유럽 무대에 적응한 그는 2005년 세계 최고의 구단 맨유(잉글랜드)에 입성하며 유럽을 호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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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분을 다 소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45분 이상은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후반에도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수원에서의 마지막 선수 시간은 51분(후반 6분)에서 멈췄다. 박지성이 교체돼 나오자 팬들은 기립박수로 경의를 표했다. 수원 서포터스는 박지성 응원가인 '위숭빠레'를 합창했다. '위승빠레'는 박지성의 네덜란드어 발음이다.
수원 구단도 박지성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물했다. 하프타임에 대형스크린을 통해 박지성이 걸어온 길을 보여줬다. 그리고 박지성을 수원의 명예선수로 선정, 트레이드 마크인 배번 7번의 유니폼을 전달했다. 땀으로 흠뻑젖은 그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했다.
박지성이 있어 수원은 특별했고, 뿌듯했고, 자부심이 대단했다. 진한 감동이 그라운드를 휘감았다. '수원의 영웅' 박지성은 결코 지지 않는 태양으로 남을 것이다.
수원=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