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대구 여성 서포터가 전하는 서울 원정기

박아람 기자

기사입력 2013-04-24 14:11



봄비치곤 제법 많은 양이 잔디를 적시던 지난 토요일, 디펜딩 챔피언 서울은 대구를 상대로 4골이나 퍼부으며 8경기 만에 리그 첫 승을 신고했다. 서울 월드컵 경기장을 찾은 만여 명의 홈 팬들이 무승의 고리를 끊어낸 기쁨을 누리는 동안, 원정 응원석에서는 서른 명 안팎의 대구 팬들이 어두운 얼굴로 응원 도구를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무거운 발 검음으로 경기장을 떠나던 그들 사이엔 여성 서포터 김연희 씨도 있었다.

"정말 힘들게 온 원정이에요."

올해로 6년째 대구의 여성 서포터즈 예그리나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의 주말은 늘 바쁘다. "이거 진짜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어느새 고작 '90분'짜리 경기를 위해 무려 '왕복 10시간'이 넘는 차편을 알아본다. 그런데 올해 들어 떠났던 울산, 강원, 수원 원정과는 달리 이번 서울 원정엔 무척이나 사연이 많았단다. 구단 측에서 정한 기준인 최소 인원 20명을 채우지 못해 응원을 위한 단체 관전 버스가 무산될 위기에 놓인 것. "개개인이 돈을 더 부담하면 안 되겠느냐."고까지 물어봤으나 '팬들이 함께 응원을 간다.'는 취지를 중요시하는 구단이 금전적인 부분만 고려해 무작정 수락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지난주 내내 여기저기 수소문해 함께 할 서포터즈를 모집했고, 경기 당일 아침엔 예그리나 8명을 포함해 총 29명이 서울행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윤성효 부적요?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랬겠어요."

'오빠야 단디해라잉', '미친 수비는 바로 나, 유경렬' 등 응원 문구가 담긴 각종 걸개를 챙긴 그들은 이번엔 특별한 걸개를 하나 더 챙겼다. 수원 시절 서울에 유독 강했던 윤성효 현 부산 감독의 얼굴이 가운데에 떡 하니 자리하고, 양옆으로 '성'과 '효'가 적힌 부적 걸개였다. 어느 기사를 통해 업로드 돼 인터넷 공간에 돌아다니던 이미지를 울산 팬들이 직접 걸개로 만든 것. 이미 지난 6일 서울에 2-0로 뒤지던 울산이 두 골을 넣어 2-2로 따라가며 효험을 보자, 이번 서울 원정을 앞두고 이들에게 직접 연락해 택배로 전해 받았다. 또, 종이에 인쇄해 몸에 지니고 다닌 것은 물론 각종 SNS 프로필 사진까지도 모두 '성효' 부적으로 대동단결했다. 서울, 강원과 함께 지난 7라운드까지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팀이라는 꼬리표를 떼기 위해서 이 정도 정성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속상해요. 진-짜 속상해요."

그런데 9시 반에 대구를 떠나 서울로 향하던 중, 고속도로 끝자락에서부터 시작된 교통 정체가 문제였다. 경기 시작 시각인 오후 2시에 가까스로 도착해 준비해온 걸개를 부랴부랴 거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지나고 있었다. 이제 막 준비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응원을 시작하려던 찰나, 전반 15분 서울 고요한의 선제골이 터졌다. 전력 차가 나는 상대와의 맞대결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응원에 집중하려 했지만, 전반 19분엔 몰리나가, 전반 27분엔 데얀이 연거푸 골을 작렬했다. 특히 페널티킥으로 기록한 데얀의 팀 세 번째 골은 너무나도 뼈아팠다. 파넨카킥으로 가볍게 톡 차올린 공이 유유히 날아가 골망을 흔들 때, 서울 팬들이 더없이 아름다운 포물선의 궤적에 감탄했을 동안 그 광경을 바로 앞에서 목격한 대구 서포터들은 피가 거꾸로 솟지 않았을까. 전반전을 마친 뒤 남긴 "진-짜 속상해요."라는 말 한마디엔 처참하기까지 했던 45분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허탈하죠. 그런데 고민하면서도 또 가겠죠."


세 골이나 내준 뒤에도 대구는 참으로 열심히 상대를 두드렸지만, 후반 37분 몰리나에게 또 한 골을 내주며 그 추격 의지는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골문 앞에서 번번이 좌절된 공격 기회에 몇몇 팬들은 울음을 터뜨렸을 정도. 경기는 추가골 없이 4-0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쉬움 가득한 경기 내용과 결과에, 앞으로 달려가야 할 머나먼 귀갓길까지 앞두고 있으니 다시는 이런 고생 사서 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법도 하다. 그럼에도 돌아온 답은 "당장은 허탈하죠. 그런데 고민하면서도 또 가겠죠.". 대구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던 그날 저녁만큼은 프로필 사진에 한 개그 프로의 캐릭터인 '앵그리성호' 이미지를 등록했으나, 이내 대구의 엠블럼이 그 자리를 밀어냈다.


"절에 가서 108배 드리고 왔어요."

다음 날, 그녀는 예그리나 일원들과 함께 대구의 한 절을 찾았다. 기왓장에 대구 선수단의 이름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담았고, 간절한 마음으로 108배를 드리고 왔다. "사실 서울 원정을 앞두고 법요집을 펴 소원을 들어준다는 신묘장구대다라니경까지 읽었는데, 너무 오랜만에 찾아봬서인지 부처님이 노하셨던 것 같아요"라더니 이번엔 아예 수험생 부모 마냥 절까지 직접 다녀온 것이다. 이번 주말엔 그 기도가 '대구의 시즌 첫 승'으로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23일 백종철 신임 감독의 선임을 알린 대구는 27일 토요일 오후 3시, 제주를 홈으로 불러 또다시 K리그 클래식 첫 승에 도전한다. <홍의택 객원기자, 제대로 축구(http://blog.naver.com/russ1010)>

※객원기자는 이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위해 스포츠조선닷컴이 섭외한 파워블로거입니다. 객원기자의 기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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