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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무뚝뚝한 그이지만, 이날만큼은 활짝 웃었다. 로만 아브라모비치 첼시 구단주가 마침내 염원하던 '빅이어(유럽챔피언스리그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빅이어'는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그가 갖지 못하는 딱 한가지였다. 집착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아브라모비치가 유럽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못했다는 이유로 경질한 6명의 감독에게 물어준 위약금만 무려 5000만파운드(약 924억원)가 넘는다. 결국 아브라모비치는 '빅이어'를 손에 넣었다. 첼시는 20일(한국시각) 독일 뮌헨 알리안츠아레나에서 열린 바이에른 뮌헨과의 2011~2012시즌 유럽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승부차기(1<4PK3>1) 끝에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유럽챔피언스리그 우승까지 이어진 굴곡은 그의 인생을 닮았다.
돈의 힘은 무서웠다. '돈으로 트로피를 살 수 없다'는 명제는 더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인수 첫 해였던 2003~2004시즌을 2위로 마친 첼시는 포르투를 유럽챔피언스리그 정상으로 이끈 '스페셜원' 조제 무리뉴 감독을 데려오며 황금기를 맞이했다. 2004~2005시즌에 50년만의 리그 정상을 차지했다. 첼시는 단숨에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을 대표하는 자리매김했다. 아브라모비치는 감독의 고유권한을 무시하던 다른 거부 구단주들과 달리 2선에서 지원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돈은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지만, 아브라모비치 자체는 팬들의 호감을 얻었다. 그러나 유럽챔피언스리그에서 계속된 실패는 아브라모비치를 변하게 했다.
아브라모비치는 2005년 AC 밀란의 특급 공격수 안드레이 셰브첸코를 당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최고액인 3000만파운드(약 554억원)에 영입했다. 아브라모비치의 독단적 결정이었다. 셰브첸코는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라는 명성과 다르게 부진을 반복했다. 아브라모비치는 자신이 결정이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다. 셰브첸코를 탐탁치 않아 하는 무리뉴 감독의 태도로 인해 아브라모비치는 그를 경질했다. 이 후 아브라모비치는 현장에 관여하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유럽챔피언스리그 우승에 실패한 감독은 가차없이 짤려나갔다. 아브라함 그랜트-펠리페 스콜라리-거스 히딩크-카를로 안첼로티-안드레 비야스 보아스가 거쳐간 첼시의 감독직은 '독이 든 성배'가 됐다. 무리뉴의 그림자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아브라모비치는 세계 최고의 명장이라면 두 눈을 부릅키고 데려왔지만, 첼시가 가장 성공을 거뒀을때는 모두 '무리뉴식 축구'를 했을때다. 유럽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한 로베르토 디 마테오 축구는 전형적인 무리뉴식 4-3-3 축구였다.
아브라모비치의 등장은 세계 축구의 지형을 바꿨다. 오일달러를 앞세워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는 맨시티와 파리생제르맹 등은 아브라모비치의 성공이 있지 않았더라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돈=성적'이라는 공식은 씁쓸하지만, 유럽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은 그의 열정만은 높이살 만 하다.
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