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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고재완 기자] 6일 오후 11시 20분 방송하는 KBS1 '다큐ON(온)'에서는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를 다룰 예정이다. 임진왜란 7년의 전란 중 가장 치열하고 처절했던 두 차례의 격전이 벌어졌던 진주성. 한번은 '진주대첩'으로 명명된 조선의 승리, 또 한번은 일본의 승리로 끝난 참혹한 보복전이었다. 진주시는 진주대첩 기념일을 진주시민의 날로 삼아 해마다 성대한 축제를 열고 있다.
진주성 전투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기록은 임진왜란 당시 두 차례의 진주성 전투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진주대첩의 주인공 김시민은 일본의 전통 연극인 가부키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만큼 충격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가토 기요마사는 고니시 유키나가와의 라이벌 의식 때문에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선봉에 섰다는 사실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뒤를 이은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임진왜란에 대한 언급과 기록을 철저하게 금기시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종전 100여 년 후 조선통신사에 의해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당시 일본 출판업계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30여 종 이상의 '징비록'이 번역 출간되는 등 베스트셀러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의 선풍적인 인기는 현재까지도 일본의 주요 고서점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출간 당시의 베스트셀러였던 조선의 '징비록'은 여전히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임진왜란의 실상을 알고 싶어 했던 당시 일본 사회의 지적 호기심이 그 이유였다.
근대로 오면서 임진왜란 기록물에 대한 일본 대중의 관심은 더 다양해졌다. 단순한 지적 호기심을 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 실패했는가'에 대한 학문적 관심까지 더해졌다. 그의 실패를 교훈 삼아 못다 이룬 조선 정벌의 야욕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조선에도 임진왜란에 대한 국가 공식 기록과 민간 기록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그러나 조선에서 남긴 기록들은 다시는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기 위해 스스로 돌아보는 반성의 기록이 대부분이었다.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의 기록과 관심은 훗날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이론적 사상적 기반으로 자라났다. 임진왜란 이후 두 나라가 전쟁을 기록하는 시각과 그 기록을 활용한 방식은 서로 달랐고, 그것은 결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시발점이 되었다.
E.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설파한 바 있다. 그의 주장대로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역사는 부단히 현재 또는 미래의 그 누군가에 의해 소환되며 새로운 현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재완 기자 star77@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