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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고재완 기자] KBS 드라마스페셜 2020 7번째 작품 '나들이'의 연기 장인 손숙과 정웅인이 '사람'에 대해 심도 있게 고찰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을 선사했다.
겉보기에는 대성한 자식들한테 대접받으며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영란의 실상은 정반대였다. 아들, 며느리, 손주까지, 이들에게 유일하게 연락 오는 순간은 돈이 필요할 때였다. 그런 와중에 치매라는 날벼락이 떨어졌고, 과거 같은 병을 앓아 '사람 노릇'을 하지 못했던 자신의 엄마와 똑같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콱 죽고만 싶었다. 그때 순철이 눈에 들어왔다. 영란은 저 멀리 지방으로 물건을 떼러 간다는 그의 여정에 장사수업을 빙자해 동행했다.
그곳에서 직접 본 순철의 흥정 실력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물건을 떼주는 사람이 그의 물러터진 성격을 금세 간파해 갑자기 값을 올렸는데도, "예, 드릴게요"라는 말밖에는 못한 것. 이에 장사 경력만 50년이 넘는 "빠꼼이" 영란이 나서 제 값에 물건을 사는데 성공했다. 그리곤 흥정하는 재미도 모르고 그저 달라는 대로 "예예"만 하는 순철을 보며 "딴 일 찾아봐. 그래가지고 처자식 건사나 잘 하겠어"라며 쓴 소리를 건넸다.
그렇게 포도 한 상자를 들고 영란을 찾아간 순철은 염치 불구 어렵게 한 마디를 꺼냈지만, 이내 실수했다는 생각에 황급히 말을 거뒀다. 영란은 아닌 척해도 못내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얼마 전 찾아온 작은 아들의 목적도 돈이었다. 하지만 태도는 정반대였다. 남인 순철도 부끄러운 줄 아는데, 피붙이인 아들은 엄마를 그저 '지갑' 취급하며 도리어 역정까지 낸 것.
영란은 하나라도 더 해주지 못한 게 못내 미안한 아빠 순철의 마음을 누구보다 깊게 헤아리고 있었다. 그녀 또한 자식에게 오장육부까지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엄마였기 때문. 마지막 나들이를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겠다고 약속한 이유였다. 속 깊은 얘기와 함께 통성명까지 나누며 나들이를 마친 이튿날, 다시 찾은 영란의 집은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치매가 더 진행되면 더는 사람 노릇 하며 살 수 없다고 판단한 영란이 약을 한꺼번에 삼킨 것. 머리맡에는 순철에게 줄 돈다발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 노릇'을 못하고 있는 건 그녀가 아니었다. 영란의 자식들은 엄마가 약을 먹고 병실에 누워있는데도, 그녀를 돌보기는커녕 순철에게 큰 돈을 남겼다는 사실에 격노했다. 순철은 찰나였지만 영란의 숨이 멎어가고 있는 순간에도 옆에 놓인 돈을 딸에게 줘야 한다는 생각에 지배됐다. 치매에 걸린 노인, 자식 노릇 하지 못하는 자식들, 자식만 보는 부모를 통해 '사람 노릇'이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 순간이었다.
결국 순철은 부모 노릇을 하려고 사람이기를 포기할 수 없어 돈을 받지 않았고, 영란은 응급실에 실려가 위세척 끝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송장처럼 누워만 있다가 사람 사는 것 같았던 순철과의 '나들이'는 영란이 요양병원에 간 이후에도 계속됐다. 자식은 보러 오지 않았지만 순철만은 그때처럼 사람 냄새 나는 '나들이'에 동행했다. "금영란 씨"라는 순철의 부름에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뒤돌아본 이는 영락없는 '사람' 금영란이었다.
고재완 기자 star77@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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