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모임 때문에 종로에 나갔다가 영화속 한 장면처럼 횡단보도에서 한 남자와 재회했다. 사실 '재회'랄 것도 없다. 내가 먼저 그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자 그도 나를 발견했는데 딱히 멈춰 서서 안부를 묻기에 거리도 애매하고 또 그만큼 지나온 세월이 무색하여 그렇게 어색한 채로 스쳐 지나가버린 것이다.
미모의 동료 하나가 그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게, 경리부 J양에게 얼마 전에 차이지 않았어? 어쩜 한 회사에서 도대체 몇 번째야?"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녀들이 문득 나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혹시 H씨가 자기에게도 그러지 않았어?"
그 뒤로 그런 남자들이 무수히 발견되는 걸 보면 그렇게 이 여자 저 여자에게 흘리고 돌아다니는 건 남자들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정자를 뿌려 수정 확률을 높이려는 남자의 '종족 보존 본능'인지, 남자로서의 욕구를 수시로 느끼고 또 풀어줘야 하는 '생물학적 본능'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다 운 좋게 한 여자가 '수확'되면 씨 뿌리고 돌아다니던 과거를 정리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또 결혼하게 되는 건 아닐까?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내가 사랑했던 그 남자들에게 나 역시 우연히 수확된 것이었을까? 그들이 흘린 그 많은 씨 하나에, 순진하게도 와르르 마음이 흔들려서는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었을까? 나 아닌 다른 여자가 먼저 수확됐다면 그들은 내가 아닌 그녀와 사랑에 빠졌을까? 그들의 본능과 사랑의 경계에서 왠지 자존심이 상한다. 여자는 여자로서의 욕구나 본능보다는 '나여야만 하는 이유' '나 말고는 안 되는 이유'가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우연히 횡단보도에서 마주친 그 남자. 그는 회사에서 뿌린 씨(?)는 하나도 수확하지 못하고 옛 여자친구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했다. 예전에는 꽤 귀엽게 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머리가 많이 빠지고 배가 볼록 나온, 전형적인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6년의 시간을 거쳐 나는 생각했다. 그에게 '수확'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가 나만 사랑한 게 아니어서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