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몇 년 전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비잔틴 제국의 멸망을 다룬 역사서 '술탄과 황제, 1453년 비잔틴 제국 최후의 날 세계사를 바꾼 리더십의 격돌'을 내 화제가 됐다. 최근 개정판을 낸 김 전 의장은 정계를 떠난 뒤 오랫동안 탐구해왔던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순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에 함락된 역사적인 사건을 책으로 펴냈다. 60년 넘게 농구와 함께 해 온 김영기 KBL 총재(80)가 팔순에 여행서를 냈다고 했을 때, 불쑥 '술탄과 황제'가 떠올랐다. 역사서와 여행서, 성격이 크게 다른데, 전문 분야가 아닌 관심 분야를 다뤘다는 점에서 닮았다.
최근 서울 신사동 KBL 센터에서 만난 김 총재를 만나 여행과 남자 프로농구 현안을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김 총재는 "운동선수들이 해외에 많이 나가지만 여행다운 여행을 못하는데, 이번에 낸 책이 자극제가 됐으면 좋겠다. 모든 걸 알아서 해야하는 자유여행은 패키지와 달리 스포츠처럼 모험적인 요소가 있어 재미있다"고 했다.
그는 또 급격하게 위상이 추락한 남자농구의 문제점을 질타하고 변화를 역설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여행기인데, 어떤 의미를 담고 싶었나요.
2004년 4월 초 총재직에서 물러났을 때 신용보증기금 시절 지인들이 여행을 함께 가자고 하더라고. 여행사 패키지를 알아보려고 했는데, 노인들은 단체여행에 안 붙여준대요. 노인들은 이것저것 귀찮은 게 많다는 거지. 그래서 우리끼리 계획 세워, 자동차 렌트해 돌아다니게 된 거야. 캐나디언 로키처럼 좋은 곳인데 못가본 곳을 행선지로 정했어. 패키지로 가면 주마간산이야. 우리 여섯명 중에 여유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도 있어요. 거기에 맞춰 비용을 최소화했지. '저비쾌유(低費快遊)', 싸고 재미있게 다니자는 게 우리 여행의 모토였어요. 캐나다는 11일간 일인당 180만원으로 갔다왔어요. 항공권, 숙소 모두 가장 싼 걸로 골라서 다녔어. 저렴한 걸 찾다보니 항공권은 주로 환승이었고. 호주갈 때는 나리타공항에서 6시간을 기다렸다 갈아탔어요. 캐나다에선 웬 노인네들이 자꾸 물건값 깎듯이 "디스카운트, 디스카운트" 하니까, 주인이 화가 났는지 나가라고 하더라고.(웃음) 싼 방을 잡다보니 침대 1,2개 정도야. 사다리 타기로 잠자리를 정했어. 그래야 싸움이 안 나거든. 내가 최연장자인데 먹는 것도 아침, 점심은 각자 알아서 먹고 싶은 걸로 해결하게 했어요. 그래야 싸움이 안나요. 나이 먹은 사람들이 군대 생활하는 것처럼 우스웠지만, 재미있더라고.
|
-연세 지긋한 분들이 여행기를 냈다고 하니 놀랍다는 반응이 많은 것 같습니다.
대학 1학년이던 1955년, 대표선수로 처음 대만에 갔어. 동남아도 가고, 프랑스도 갔었지. 그때 외국에 간 게 20여차례 되나. 금융기관에 있을 때 포함하면 100번 쯤 나간 것 같아. 안 세봤지만 50~60개국 되려나. 책 냈다니까, 다들 에베레스트 정상에 갔다온 것처럼 말하더라고. 내 나이가 그렇게 많은 건가.(웃음) 크루즈도 있고, 편하고 좋은 여행이 많지만, 나한테 여행은 모험이지.
-책을 생각하고 여행을 한 것은 아니겠고, 출간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책 낸다는 생각은 못했어. 신용보증기금에서 월간지를 발행하거든. 노인네들이 여행간다고 하니까, 사진 위주로 서너페이지 실어줬지. 내가 여행 다닌다는 애길 듣고, 홍봉철 인천 전자랜드 구단주가 그러더라고. 은퇴하면 친구들이랑 여행하고 싶은데, 참고하게 책을 내보라고 했어. 그래서 나오게 된거지. 행선지를 잘 골랐어요. 캐나디언 로키는 산과 호수, 그랜드 서클은 서부영화에 나오는 곳이잖아. 호주는 때묻지 않은 황무지, 산하가 그대로 남아있고. 하와이하면 바다만 생각하는데, 산을 안 가면 바보야. 알프스에선 인스부르크, 생모리츠, 샤모니같은 동계올림픽 개최 장소를 찾아다녔어. 여행을 굉장히 계획적으로 준비했어요. 숙소, 렌터카, 일정, 교통위반 처리, 음식 담당을 다 정했어. 맥아더 장군이 상륙작전하듯 준비하고 다녔지. 워낙 준비를 잘 해 어디가면 구멍가게가 있다, 이런 것까지 파악하고 갔다고. 교통위반하면 아무나 못나가, 영어 잘 하는 사람이 나가면 딱지 떼니까, 가장 나이들어 보이는 사람이 나가 한국말만 해. 그러면 경찰이 답답해서 그냥 가라고 해.(웃음) 여행하고 나면 서로 원수가 되는데, 복불복이 가장 원시적이지만 공평하고 재미있어.
-다음 여행지기 궁금한데 정하셨나요.
다들 또 가자고 안달이야. 빨리 총재 그만두고 가자고 그래요.(웃음) 비용 줄여서 다니면, 집에서 생활할 때 드는 비용 정도면 돼. 다음에는 앨라스카를 가려고 해요. 낮이 긴 여름에 가야지. 앵커리지에서 자동차를 빌려 맥킨리산 가서 빙하도 보고 그래야지. 운동선수 때 해외에 많이 나갔지만, 여행다운 여행을 못했어. 이란 테헤란에 가선 경기장, 숙소만 왔다갔다했지. 스포츠와 여행이 비슷한 게 많아요. 둘 다 불확실한 면이 많잖아요. 부딪히며 모험을 즐기는 게 여행이지. 언어 문제가 있고 차를 빌려야 하지만, 어려운 게 아니거든. 이번 연말에 여행기를 KBL 10개 구단 코칭스태프, 선수 200여명에게 나눠줄 생각이야. 여행 충동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총재께서 운동할 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지요.
우리 선수들이 선수하고만 어울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팬 중에는 법관도 있고, 기업인도 있고, 공무원도 있잖아. 좀 넓게 살았으면 해. 1960년대 초반부터 30년 넘게 금융기관에서 일했는데, 밤새 공부하고 시험보고 그랬어요. 은행 영업 창구에서 통장발급도 하고 그랬지. 그 때는 오전 근무하고, 오후에 훈련했어. 대표팀 소집 때도 오전 근무 마치고, 오후에 선수촌에 가고 그랬어.
|
가장 자랑스러운 게 대표팀 감독이야. 1969년부터 1976년까지 7년간 대표팀을 맡았지. 그 땐 원정가면 무조건 선수들에게 책 2~3권씩 들고가게 했어요. 다 읽고 나면 바꿔서 읽게 했어요. 내가 책을 좋아해요. 한때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는 거의 다 읽었어. 존 그리샴의 법정소설, 시드니 셀던같은 작가를 좋아했어. 원어로 된 책을 찾아서 읽는데, 재미있는 책이 없어질까 걱정이야.(웃음) 존 그리샴 책은 23권 다 읽었어.(김 총재는 지인이 선물해 읽고 있다며,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A Walk in the Woods)과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개의 찬란한 태양(A Thousand Splendid Suns)' 영어판을 보여줬다)
-부자(父子) 농구인인데, 3세까지 농구 인연이 계속되는 건가요.
나는 고등학교(배재고) 2학년 때 시작했어. 상당히 늦은 거지. 둘째 아들(김상식 전 오리온스 감독)이 농구하겠다고 해서 말렸어. 엘리트 체육이라 농구만 해야하는 상황이라, 그렇게 키우면 안 되겠더라고. 운동도 하고 공부도 했으면 싶었는데. 고집이 세 죽어도 하겠다는 거야. 하도 울고불고 난리를 쳐 중학교 3학년 때 허락했지. 소질이 있어 일찍 시켰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외손녀가 키가 1m70에다 농구에 소질이 있어요. 유전적인 요인이 있나봐.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아이가 공부를 너무 잘해요. 외고에 다녀요. 공부하면서 운동시켰으면 좋겠는데, 부모가 절대 안 된다고 해. 욕심같아선 나처럼 공부도 하고 농구도 해 대표선수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대학교 때 수업 못 들어가 경고도 먹고, 학점 못 따 6개월 늦게 졸업을 했지.(웃음) 도쿄올림픽 때 미국농구대표팀 주장이었던 빌 브래들리는 로즈장학금을 받고 영국에서 공부했잖아. 연방상원의원도 지내고.(김 총재는 시험치고 고려대에 입학해, 정상 수업을 받으면서 농구를 계속했다)
민창기 기자 huelv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