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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자농구, '카이저법' 만들어지나?

남정석 기자

기사입력 2013-02-12 12:50 | 최종수정 2013-02-12 12:51


◇지난 3일 KB국민은행-삼성생명의 경기에서 KB국민은행 카이저(왼쪽)가 삼성생명 해리스의 마크를 뚫고 슛을 시도하려 하고 있다. 사진제공=WKBL

절름발이는 경찰서에서 풀려난 후 사람들의 눈길을 피할 수 있자 어느새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한다.

살인마 '카이저 소제'를 즉흥적으로 꾸며냈던 이 가짜 절름발이의 소름끼치는 돌변에 관객들은 뒷통수를 맞은 듯 멍했다. 반전의 묘미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줬던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마지막 장면이다.

여자 프로농구 KB국민은행의 외국인 선수 카이저는 지난 9일 신한은행전에서 이전에 다쳤던 발목 부상을 이유로 출전을 거부했다. 당일 오전까지는 아무 얘기 없다가 에이전트와의 통화 이후 오후에 갑자기 돌변한 것이다. 이날 털모자를 눌러쓴 채 벤치에서 '관객'으로 앉아 팀의 패배를 지켜본 카이저는 발을 절룩거리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지자 갑자기 정상적으로 걸었다. 그런데 구단 단장을 비롯해 몇몇 관계자가 이 장면을 목격했다. 마치 영화처럼 '카이저'에게 당한 것이다.

카이저 사건으로 인해 한국 여자 프로농구의 외국인 선수 제도 난맥상이 드러났다. 올 시즌이 시작된 후에 외국인 선수를 5년만에 재영입하겠다고 부랴부랴 발표했을 때부터 예견된 결과였다. 따라서 이를 계기로 일명 '카이저법'이 만들어질 태세다.

이번 사례는 외국인 선수 계약의 허점을 철저히 노렸다는 점에서 파장이 컸다. WKBL(한국여자농구연맹) 지정 병원에서 부상으로 판정을 받으면 연봉을 100% 지급해야 한다. 또 팀의 결정으로 선수와 계약을 해지해도 잔여 연봉을 그대로 줘야 한다. 퇴출 즉시 연봉 지급이 끊기는 남자 농구와는 천양지차다.

갑자기 시행하다보니 선수들의 실제 경기 장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한정된 동영상, 그리고 에이전트의 자료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2명의 에이전트에 의뢰를 했는데, 그나마 1명이 자격정지를 당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나머지 1명의 소속 선수 가운데 선택해야 했던 점도 문제를 키웠다. 남자 농구의 경우 통역 담당이 외국인 선수 스카우트를 겸하는 경우가 많지만, 여자 농구에선 그렇지 못하는 것도 한계로 지적됐다.

카이저는 지난해 12월16일 삼성생명전에서 발목 부상을 당한 후 무려 47일만에 복귀전을 치렀다. 문제는 이 기간동안 카이저가 이런저런 이유로 불성실하게 재활에 임했다는 것. 이후 병원에서 뛰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진단했음에도, 부상 재발에 대한 걱정을 이유로 일주일 이상 복귀를 늦춘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지난 8일 미국 WNBA 피닉스 머큐리와의 재계약에 성공하자, 다음날부터 태업에 돌입한 것으로 팀에선 판단하고 있다. KB국민은행 구병두 감독대행은 "재활 기간동안에도 제대로 몸을 만들지 않았다. 또 팀에는 별 애정이 없으며 자신의 몸이 훨씬 중요하다고 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이런 상황에서 카이저는 자신의 트위터에 '피닉스와 재계약을 해 기쁘다. 빨리 돌아가고 싶다' 등의 글과 함께 현재 상황에 비춰봤을 때 한국 여자농구를 비하하는 듯한 글까지 남겨 농구팬들의 공분까지 불러일으켰다.


한국 여자농구의 연봉은 결코 적지 않다. WNBA의 경우 여름 4개월간 34경기를 진행하는데, 선수들의 평균 연봉은 5만~7만달러이다. 특급 선수들의 연봉도 10만~13만달러 수준이다. 한국에선 월봉이 3만달러(약 3280만원)으로, 정규시즌만 따져도 10만달러가 넘는다. 여기에 승리수당과 플레이오프 진출 수당까지 더해지면 WNBA의 수준을 능가한다. 외국인 선수들로선 '아르바이트'가 아닌 또 하나의 본업인 셈이다.

KB국민은행 황성현 사무국장은 "병원에서 문제가 없음에도 9일부터 뛰지 않은 것이니 잔여 연봉은 주지 않아도 되지만 돈은 부차적인 문제다"며 "교체 없이 47일이나 기다려 준 팀의 뒷통수를 쳤다. 팀 분위기를 해치기에 퇴출을 결정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는 우리팀처럼 피해를 보지 않도록 제도적 보완 장치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대해 WKBL 관계자는 "남자 농구의 외국인 선수 제도가 16년이 됐음에도, 거의 매년 바뀌는 것처럼 쉽지 않은 문제임에는 틀림없다"며 "올 시즌이 끝난 후 2명 보유 1명 출전이라는 대안을 포함해 계약 조건 수정 등 보완책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팀에서 차지하는 외국인 선수의 비중이 커지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문제가 불거지면서 신한은행을 비롯한 몇몇 팀에선 남자 농구처럼 아예 오프시즌에 북미나 유럽을 돌아다니며 선수들의 경기를 직접 지켜볼 계획까지 잡고 있다.
남정석 기자 bluesky@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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