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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의도한 건 아니다. 넥센 히어로즈 투수 에스밀 로저스에게 한화 이글스는 '전 소속팀'일 뿐이다. 선수들과의 친분이 약간 남아있는 정도다.
원래부터 이날 등판이 예정돼 있던 로저스는 3연전 기간 내내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지난번 KBO의 엄중경고 이후 상당히 조심하는 게 보였다. 또한 넥센 장정석 감독 역시 당시 사건 이후 로저스와 따로 면담을 갖고 불필요하게 오해를 사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 장 감독은 "로저스는 악동이 아니다. 다만 천진난만하고 밝은 성격 때문에 가끔 돌출행동을 할 뿐이다. 전혀 악의는 없다. 개막 한화전 때도 친근함의 표시를 다소 과하게 한 것이었다. 로저스도 '앞으로 조심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약속 때문인지 로저스는 팀 훈련 때 가끔 덕아웃에서 동료들과 환담을 나눌 뿐 돌발 행동을 자제했다. 특히 이날 경기에서도 한화의 옛 동료들과 굳이 접촉하지 않았다. 외국인 선수 제라드 호잉과 몇 마디 말을 나눈 게 전부였다.
마침 팀도 3연승을 거두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인지 로저스는 1회부터 전력 투구를 했다. 이전까지 주로 140㎞대 후반을 찍었던 포심 패스트볼이 1회부터 여러 차례 150㎞를 넘겼다. 이날 최고구속은 152㎞였다. 여기에 슬라이더(130~142㎞)와 커브(121~131㎞), 체인지업(135~139㎞), 싱커(144~149㎞)를 골고루 배합하며 한화 타선을 무력화 시켰다. 특이점은 여러 구종을 거의 균일하게 배합했다는 것. 총 투구수 100개 중에서 패스트볼이 30%에 불과했다. 나머지 70%는 슬라이더(26%)와 체인지업(20%) 커브(12%) 싱커(12%)로 채웠다.
가뜩이나 빼어난 패스트볼을 지닌 로저스가 이렇게 여러 변화구를 섞어 던지자 한화 타선은 전혀 공략 포인트를 만들지 못했다. 이용규만이 1회와 3회에 힘을 뺀 콘택트 스윙으로 멀티히트를 뽑아냈을 뿐이다. 다른 타자들은 로저스의 공을 거의 치지 못했다. 9회까지 3개의 안타만 추가했을 뿐이다.
1회 선두타자 이용규에게 중전안타를 맞은 로저스는 하주석과 송광민을 연속 삼진 처리한 뒤 호잉도 1루수 땅볼로 잡아냈다. 2회에는 삼자범퇴, 3회에는 2사후 이용규가 툭 맞힌 공이 중전안타가 됐다. 그러나 하주석을 2루 땅볼로 처리했다. 3회에 기록한 17구가 이날 가장 많은 이닝당 투구수 였다.
때마침 넥센 타선도 1회와 2회에 2점씩 내주며 로저스에게 힘을 보탰다. 로저스의 유일한 실점은 4회에 나왔다. 선두타자 송광민에게 우중간 2루타를 맞은 뒤 호잉에게도 좌전안타를 허용해 무사 1, 3루에 몰렸다. 이어 타석에는 5번 이성열. 실투를 하면 대량 실점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로저스는 이성열을 3루수 앞 병살타로 처리했다. 넥센 내야진은 3루 주자 송광민의 득점을 용인하는 대신 아웃카운트를 2개 늘렸다. 1루에서 이성열이 처음에 세이프 판정을 받았지만, 이후 비디오판독을 통해 아웃으로 정정됐다. 위기를 넘긴 로저스는 김태균을 1루수 파울플라이로 돌려세웠다.
5회부터는 완투 종착역을 향한 고속 질주였다. 삼진을 곁들인 삼자범퇴 행렬이 5~7회에 이어졌다. 8회에는 선두타자 양성우에게 좌전안타를 맞았지만, 후속 지성준을 투수-유격수-1루수로 이어지는 병살타로 잡은 뒤 정경운을 삼진처리해 또 삼자범퇴를 만들었다. 여기까지 투구수는 93개. 스코어가 이미 10-1로 벌어져 교체를 생각해볼 수도 있었지만, 로저스는 9회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유격수 땅볼(이동훈)-삼진(하주석)-투수 땅볼(송광민)을 이끌어내며 단 7구만에 경기를 끝내버렸다. 투구수는 딱 100개로 맞춰졌다.
이날 완투승을 거둔 로저스는 "오랜만에 완투해서 기분이 좋다. 이런 기분을 계속 유지한 채 앞으로도 잘 던지고 싶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어 "7회 이후에 감독님께서 계속 던질 것인 지 물어봤다. 그때까지 투구수 관리(80구)가 잘 돼서 더 던지고 싶다고 했다. 덕분에 좋은 결과도 얻어냈다"고 완투승의 뒷 이야기를 들려줬다.
자꾸만 연관성이 부각되는 한화에 대해서는 "전 소속팀이지만, 특별히 신경 쓰이는 건 없다. 지금 나는 넥센 선발일 뿐이다. 늘 하던대로 준비했고, 특별한 전략이랄 것도 없었다. 그저 투수 코치와 상의한대로, 포수 리드대로 즐기면서 던졌다. 완투가 오랜만인데 앞으로도 기회가 생기면 또 도전하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대전=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