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오묘한 '주전의 세계'

이명노 기자

기사입력 2013-06-20 12:23 | 최종수정 2013-06-20 12:23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살다 보면 흔히 듣는 소리, 야구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NC 모창민은 올해부터 새로운 야구 인생을 살고 있다. 지난해까진 '멀티플레이어'란 소릴 듣고 이 자리 저 자리를 오갔다. 내야와 외야 수비가 모두 가능해 팀에서 활용도가 높았다. 하지만 정해진 자리는 없었다.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벤치에 앉는 일도 많았다. 언제나 '백업선수'란 이미지를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당당히 한 팀의 주전이다. NC에서 주전 3루수, 상황에 따라 1루수를 맡고 있다. 중심타선 뒤를 받히는 6번타자 혹은 공격 첨병인 2번타자로 나서고 있다. 자리만 달라진 게 아니다. 성적도 좋아졌다. 모창민은 19일 현재 타율 3할3푼1리 4홈런 18타점을 기록중이다. 두 차례의 부상 공백으로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지만, 이대로 나아가면 타격순위에 들 만한 페이스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달라지게 만들었을까. 모창민은 "예전엔 한 타석 나가서 못 치면 끝이었다. 하지만 이젠 못 쳐도 다음 기회가 있다. 오늘 못 해도 내일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실제로 백업선수는 기회에 대한 강한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주전들에 비해 타석에 나가는 횟수가 현저히 작다 보니, 나갔을 때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러한 절박함은 대개 좋은 결과보다는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조급해져서 나쁜 볼에 손이 나가거나, 자기 스윙을 못하는 일이 많다.

모창민을 두고 "SK 최 정처럼 성장할 수 있다"고 한 김경문 감독은 "언제 나갈지 모르는 백업선수와 달리, 오늘 못해도 내일 나간다는 건 크게 작용한다. 선수 본인이 책임감을 갖고 준비하게 된다. 창민를 비롯해 우리 팀에서 새로 기회를 받는 선수들 모두 '계속 나간다'는 사실 하나로 컨디션이 떨어져도 버티고 이겨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16일 창원 마산야구장에서 프로야구 NC와 삼성의 주말 3연전 마지막 경기가 열렸다. NC 모창민이 5회 2사에서 좌중월 솔로포를 날렸다. .
창원=송정헌 기자 songs@sportschosun.com/2013.6.16
모창민은 또다른 증언도 했다. 백업선수들의 적은 기회는 기술적인 부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사실 예전엔 내 폼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나갈 때마다 매번 타격폼이 바뀌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해서 잘 치면 이렇게 치고, 안 되면 자꾸만 다른 걸 해보게 된다"고 털어놨다.

모창민이 자신의 타격폼을 만든 건 꾸준한 출전기회를 보장받은 상무 시절이었다. 아마추어 시절 많은 주목을 받고 프로에 입단한 뒤 3년이란 시간 동안 하지 못한 걸, 군생활 2년 동안 해낸 것이다. NC에 온 뒤로 타격폼을 바꿨고, 이젠 그 폼을 자기 걸로 정립했다.


광주일고-성균관대를 졸업한 모창민은 2008년 2차 1라운드 전체 3순위로 SK에 입단했다. 상위순번에서 나타나듯, 아마추어 시절부터 평가가 좋았다. 체격이나 힘이 좋을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성실하게 훈련하는 모습에서 '대형 타자'의 자질을 본 것이다.

하지만 모창민은 성장하지 못했다. 프로 입단 후 수년간 2군에 머무는 다른 선수들과 달리, 일찌감치 기회를 잡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백업선수의 경우, 코칭스태프의 기대치가 제한돼 있어 지도에 있어서도 한계가 생길 때가 있다. 주전급 선수와 달리,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집중지도에도 나아지지 않을 수도 있다. 선수가 제한된 기회나 많은 이들의 기대에 강한 압박을 받는 케이스다. 넥센의 4번타자로 성장한 박병호가 대표적이다.


21일 오후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2013 프로야구 NC와 넥센의 경기가 열렸다. 6회말 2사 2,3루서 넥센 박병호가 우중월 3점 홈런을 치고 있다.
목동=김경민 기자 kyungmin@sportschosun.com / 2013.04.21.
아마추어 시절 괴력을 뽐냈던 박병호는 2005년 1차 지명으로 LG에 입단했다. 우타 거포의 탄생을 바랬던 팀과 팬들의 열망을 해결해 줄 존재로 여겨졌다. 하지만 나무 배트 적응에 실패하면서 수년간 정체돼 있었다. '만년 유망주'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결국 트레이드 카드가 돼버린 박병호는 넥센에서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됐다. 넥센 코칭스태프는 박병호에게 "삼진 당해도 좋으니, 마음껏 스윙하고 와라"는 주문을 했다. 박병호가 가진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던 것이다. 박병호 역시 "LG 시절엔 오랜만에 들어간 타석에서 못 치면 완전히 위축됐다"고 고백했다. 박병호의 경우엔 '못 치면 2군'이란 압박에 시달렸다. 자기가 가진 장점을 십분 발휘하지 못했다.

최근 LG는 박병호 대신 남은 우타 거포 유망주, 정의윤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정의윤은 2005년 2차 1라운드 전체 3순위로 LG 유니폼을 입었다. 김기태 감독은 지난해부터 정의윤을 직접 챙기며 타격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있다. 김무관 타격코치 역시 정의윤 만들기에 공을 들였다.

서서히 그 결과가 나오고 있다. 이젠 아예 4번타자로 고정시켜놓고 믿음을 주고 있다. 김 감독은 "본인이 그만큼 연구하고 노력한 대가다. 4번 자리를 주는 것도 그만한 배경이 있다. 잘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정의윤은 LG 입단 동기 박병호가 잘 나갈 때, 많은 것을 물어봤다. 친구에게 돌아온 대답은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감', '심리적인 부분'이었다.

'내일이 있다'는 생각, '내 자리가 있다'는 생각은 선수들을 바꾼다. 물론 이들을 기용하는 데 실패할 경우, 모든 비난은 감독에게 쏠린다. 하지만 그 위험을 감수하면, 좋은 선수를 얻게 될 수 있다.


이명노 기자 nirvana@sportschosun.com


주중 3연전을 위닝시리즈로 마친 LG와 롯데가 주말 3연전 잠실에서 만났다. 7일 잠실구장에서 펼쳐질 LG와 롯데의 2013 프로야구 주말 3연전 첫번째 경기 전 LG 김기태 감독이 정의윤의 타격자세를 지도하고 있다.
잠실=허상욱 기자 wook@sportschosun.com/2013.06.07/

:) 당신이 좋아할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