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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의 1라운드 탈락, 비단 이번 대회 성적만이 문제가 아니다. 한국프로야구 흥행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울 수도 있다.
물론 시행착오는 있었다. '더블 엘리미네이션(패자부활전 개념을 도입한 토너먼트)' 규정 탓에 한 팀과 지나치게 많이 대결하는 등의 부작용도 있었다. 대회의 주축이 된 미국이 시즌 직전 열리는 대회 특성을 감안, 선수보호라는 명목 아래 투구수 제한 등 어색한 규정을 넣기도 했지만, 이 모든 게 나름 재미를 줄 수 있는 요소로 여겨졌다.
대표팀도 신바람나게 뛰었다. 한국은 첫 대회에서 4강 신화를 썼다. 덩치 크고 힘도 좋은, 전형적인 '메이저리거'들이 넘치는 대회에서 '작은 거인'이라 불릴 만한 성적을 이뤄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은 화룡점정이었다. 2009년 열린 2회 WBC 땐 4강을 넘어 준우승을 거뒀다. 야구를 잘 몰랐던 팬들도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됐고, 하나 둘씩 야구장을 찾았다.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프로야구가 여성에게 친숙한 스포츠가 된 것도 이때부터다. "나 저 선수 알아"라는 작은 관심이 모여, 프로야구판 전체를 키웠다. 야구 관전은 스포츠를 넘어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다. 전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국제대회에서의 성공이 프로스포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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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한국프로야구는 기어코 700만 관중을 돌파했다. 9구단을 넘어 10구단까지 창단했다. 한때 8개 구단 존속을 걱정해야 했던 프로야구가 현대유니콘스의 해체 이후 5년 만에 두자릿수 구단을 가진 '거대 공룡'이 됐다.
하지만 잘 나갈 때일수록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이번 WBC 참패는 첫 번째 위기다. 이번 대회는 준비 과정부터 험난했다. 대표팀 선발부터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국제대회 때마다 나왔던 얘기인 전임 감독 체제는 물론이고, 선수 선발, 선수단 운용, 준비 부족 등.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계속된 국제대회에서의 성공, 그리고 프로야구 흥행 순항. 한국야구에 긴장의 끈이 조금은 풀렸던 게 아닐까.
이미 지난해부터 프로야구의 질적 수준이 저하되고 있다는 지적은 계속 됐다. 올시즌은 더 큰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9구단 NC가 1군에 진입해 홀수구단 체제로 프로야구가 진행된다. 막내구단 NC의 경기력은 물론이고, 기형적 일정에서 나오는 전체적인 경기력 저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런 악재들 때문에 직전 시즌 사상 최고의 흥행 실적에도 불구하고 올시즌부터는 오히려 위기가 시작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어왔다. 더욱이 이 모든 악재들을 덮을 수 있을 카드로 기대됐던 WBC마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번 대회의 실패는 '700만 관중이 선수들을 망쳤다'는 역설적인 생각까지 갖게 만든다. 되풀이되는 국제대회의 성공과 터져나가는 관중석을 바라보면서 부지불식간에 한국야구가 '배부른 베짱이'가 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모든 산업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언제까지 프로야구가 성장만 할 수는 없다. 가파른 성장세를 겪었으니 한 풀 꺾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위험하다. 적어도 2년간 한국야구는 홀수구단 체제로 불안한 리그를 계속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90년대 중흥기를 맞았던 프로야구가 2000년대 들어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했던 사례가 되풀이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야구인들이 전념해야 할 것은 다름아닌 경기의 질이다. 팬들은 냉정하다. 자신이 지불한 가치를 얻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철저히 외면한다. 물론 국제대회 한 번의 실패로 모든 팬들이 순식간에 프로야구를 멀리 할 리는 없다. 하지만 국제대회의 호성적이 프로야구의 고도 성장 때 그러했듯, 이번엔 나쁜 결과가 '기폭제' 역할을 할 수는 있다.
WBC 조기 탈락은 한국프로야구에 대한 심각한 경고다. 프로야구는 냉정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이명노 기자 nirvana@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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