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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2년 전 일이다. 2010년 11월 롯데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고려대 감독이던 양승호 감독을 선임했다. 양 감독은 시작부터 험난한 길을 걸었다. 야구에 대한 열성이라면 못말리는 롯데. 주변에서 "어디서 저런 아마추어 감독을 데려왔느냐"며 모두가 색안경을 끼고 봤다. 데뷔 후 시즌 초반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적이 곤두박질치자 "그럼 그렇지"라는 얘기를 들으며 상상하지도 못했던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랬던 양 감독이 이제 롯데에서 두 시즌째를 마무리해가고 있다. 그런데 이 양 감독에게서 조심스럽게 명장의 향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저조한 컨디션으로 이날 경기 선발라인업에서 제외됐던 조성환은 7회 동점이 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그것도 국내 최고의 좌완 불펜이라는 박희수를 상대로 타석에 등장했다. 포스트시즌 들어 계속해서 좋은 타격감을 이어오던 박준서 대신 선택한 카드. 조금은 의아한 선택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성환은 보란 듯이 동점 적시타를 쳐냈다. 양 감독은 기세가 오른 박희수를 제압할 수 있는 무기는 '경험'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7회말 위기를 넘기는 장면도 압권. 4-4로 동점을 만든 후 롯데는 이명우가 선두타자 정근우에게 3루타를 허용하며 위기를 맞았다. 보통은 위기를 자초한 곧바로 투수를 교체해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양 감독은 이명우에게 좌타자 박재상과의 승부를 맡겼다. 이명우가 박재상을 2루 땅볼로 잡아내며 한숨을 돌리자 곧바로 김성배 카드를 꺼내들었다. 김성배는 이호준을 포수 파울플리아, 박정권을 우익수 플라이로 처리하며 위기를 넘겼다. 단순한 '좌-우 놀이'가 아니었다. 박정권은 좌타자다. 투수-타자의 상대적인 스타일 차이와 흐름을 고려한 교체였다.
플레이오프 2차전 뿐 아니다. 양 감독은 준플레이오프에서도 적재적소의 용병술로 박준서라는 깜짝 스타를 탄생시켰다. 필승카드 정대현과 마무리 김사율의 깔끔한 보직정리도 준플레이오프 승리의 발판이 됐다. 4차전 만루 찬스에서 정 훈 대신 황성용을 투입한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타율, 이름값 등을 놓고 볼 때 "두 선수가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양 감독은 선구안과 컨택트 능력이 앞서는 황성용을 선택했고, 결국 천금같은 밀어내기 득점을 얻어낼 수 있었다.
'바쁘다 바뻐' 직접 게임을 지배하다.
양 감독은 준플레이오프 4차전 승리를 이끈 후 "큰 경기에서는 선수를 믿으면 안된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평소 "야구는 선수가 하는 것이다", "항상 우리 선수들을 믿는다"라며 덕장의 이미지를 풍겨온 양 감독이기 때문에 이 발언의 배경에 많은 관심이 쏠렸다. 양 감독은 "큰 경기에서는 선수를 한 없이 믿는 것 보다 덕아웃에서 일일이 작전을 내는게 오히려 선수를 편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정규시즌에서 양 감독의 야구는 '믿음의 야구'로 대변됐다. 주전선수가 부진해도 끝까지 믿고 기용했다. 그라운드 위에서도 선수의 판단을 중시했다. 그런 양 감독이 냉정하게 변했다. 오직 승리를 위해서였다. 사실 플레이오프 2차전 선발 라인업에 조성환이 빠졌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일이다. 준플레이오프 1차전부터 부진의 늪에 빠졌던 조성환이지만 양 감독은 계속해서 조성환을 기용했다. 하지만 1차전 패배 후 "선수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주겠다"며 결단을 내렸다.
1차전, 박준서 대타 투입 장면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숨겨진 사실 하나. 양 감독은 볼카운트 1B1S 상황서 박종윤에게 자신감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체라는 강수를 뒀다. 양 감독 야구 인생에 타석 중도 교체는 처음이라고 한다. 이 사실만 놀라운게 아니다. 사실 박준서는 박종윤 다음 타순이던 전준우의 타석 때 대타 투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 감독의 신뢰를 듬뿍 받아온 전준우지만 포스트시즌 들어 타격감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양 감독이 과감한 선택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 평소 그라운드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던 양 감독이 플레이오프 들어서는 바쁘게 그라운드와 덕아웃을 오가고 있다. 투수교체 때 직접 마운드에 오르는 것은 물론, 수시로 그라운드에 나와 투수들과 타자들에게 직접 작전지시를 내린다. 어떻게 보면 선수둘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큰 경기에서는 오히려 선수들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게 양 감독의 생각이다.
작전 뿐 아니다. 팀 분위기를 위해서라면 적극적으로 세리머니를 하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큰 경기에서 감독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난해 플레이오프, 이번 준플레이오프를 통해 깨달았다.
김 용 기자 aweso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