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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이승엽(36·삼성)이 자꾸 번트를 댄다.
삼성팬들은 여전히 이승엽이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홈런"을 연호한다. 하지만 이제 아시아의 홈런왕인 그는 변했다. 2003년 아시아 홈런 신기록인 56홈런을 쳤던 그 이승엽이 아니다. 10년의 세월이 흘렀고, 살아 남기 위해 그는 변해야 했다.
이승엽이 이번 시즌 보여준 부문별 기록(24일 현재)을 보면 알 수 있다. 타율 3할1푼1리(3위), 84타점(3위), 82득점(공동 1위), 21홈런(4위), 145안타(2위) 등이다.
그는 여름을 지나면서 체력적으로 힘들다는 얘기를 했다. 또 시즌 내내 왼쪽 어깨의 미세한 통증을 참고 경기에 출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즌 초반 홈런을 자주 칠 때도 홈런왕 타이틀에 대해 욕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가 올해 홈런왕을 하면 후배들이 분발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그의 말대로 이승엽이 홈런 20개 초반에 머물러 있을 때 넥센 박병호는 30홈런까지 치고 올라갔다.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대신 이승엽은 홈런 보다 안타와 출루에 신경썼다. 그런 노력이 지금 최다안타와 득점 부문 타이틀에 근접하게 됐다. 최다안타는 롯데 손아섭(146개) 한화 김태균(145개)과 치열하게 경합하고 있다. 득점은 KIA 이용규와 82개로 나란히 선두다.
이승엽은 시즌 초반 "예전 같았으면 홈런이 되어야 할 타구가 자꾸 담장 근처에서 잡힌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파워가 줄었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됐다. 그러면서 그는 굳이 홈런에 집착하지 않았다. 홈런을 의식하는 큰 스윙도 하지 않았다. 대신 정확하게 맞히는 걸 최우선으로 했다.
이승엽의 방망이 컨택트 능력은 2003년 삼성 시절 이후 9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한국 보다 정교한 제구를 자랑하는 일본 투수들과 8년간 상대하면서 맞히는 재주는 좋아졌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번 시즌 145안타로 2003년 삼성 시절 144안타를 넘어섰다.
그는 지난해 12월 친정 삼성과 총액 11억원(옵션 포함, 연봉 8억원)에 1년 간 계약했다. 류중일 감독은 이승엽 복귀 첫 해는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삼성과 이승엽이 시즌 종료 후 재계약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승엽은 향후 4~5년 정도 더 선수로 뛰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번 시즌을 통해 선수 생활의 후반부에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 지 그 길을 찾았다. 10년 전 같은 화려한 홈런 보다 팀에 보탬이 되는 번트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
대구=노주환 기자 nogoo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