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나무배트가 가져온 나비효과, 2012 아마야구 현실은?

이명노 기자

기사입력 2012-09-07 18:17



지난 2004년 4월, 대한야구협회는 고교야구에서 알루미늄 배트 사용을 전면 금지시켰다. 국제야구연맹(IBAF)에서 그해부터 청소년급 이상의 모든 대회에서 나무 배트만을 사용키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해 8월 열린 봉황대기부터 나무 배트 사용이 강제화됐다. '국제 경쟁력 강화'와 '시대의 흐름'이란 이유로 알루미늄 배트 시대는 막을 내려야만 했다.

나무 배트를 사용하기 시작한지 만 8년이 지났다. 자칫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방망이의 교체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서울에서 개최된 제25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개최국의 자존심을 구겼다. 여기까지 흘러온 과정을 보면 마치 '나비 효과'를 보는 듯 하다.

나무 배트가 불러온 스몰볼, 기본기도 없는데?

알루미늄 배트 사용이 전면금지되자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은 홈런의 실종이었다. 가볍고, 반발력이 좋은 알루미늄 배트는 방망이 중심에 맞지 않아도 타구를 멀리 보낼 수 있다, 손목 힘만 있다면, 빗맞은 타구도 외야를 넘어가곤 했다. 하지만 나무 배트는 배트 중심에 정확히 맞아야 장타로 연결된다. 보다 정확한 배트 컨트롤이 요구되는 건 기본이다.

스카우트들은 당시엔 나무 배트 도입을 반겼다. 프로에서 나무 배트 적응에 실패한 유망주들이 워낙 많았기에 하나의 검증 과정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이후 고교야구의 트렌드는 점점 '스몰볼'로 흘러갔다. 점점 방망이를 짧게 잡고 큰 스윙 대신 공을 맞히는 데 집중했다. 안타를 치면 으레 희생번트가 나와 주자를 2루로 보냈다. 선수에게 맡기는 야구는 사라졌고, 벤치는 적극적으로 사인을 냈다.

스몰볼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선 기본기가 중요하다. 기본기가 있어야 수비 시프트를 해도 실수가 나오지 않고, 상대를 흔드는 베이스러닝을 할 수 있다. '기본기=실력'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2012년 고교야구의 현실을 냉정하게 보면 아기자기한 야구가 아닌, '수준 이하'의 야구다. 기본기가 없는데 아무리 좋은 작전이 나와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번 대회에서 대표팀은 결정적일 때마다 수비실책, 주루 미스, 작전 수행 실패를 범했다. 이정훈 감독 역시 쓴소리를 내뱉었다. 이 감독은 "최근 몇 년째 순수신인이 신인왕에 오른 적이 없지 않나. 그만큼 해가 갈수록 고교선수들의 실력이 낮아지고 있다는 의미"라며 아쉬워했다.


5일 잠실구장에서 제25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결선라운드 한국과 대만의 경기가 열렸다. 8회말 1사 3루 한국 김민준의 스퀴즈 번트 시도가 상대팀 배터리에 간파되며 실패한 후 3루주자 유영준이 홈으로 들어오다 협살에 걸려 태그아웃되고 있다.
잠실=정재근 기자 cjg@sportschosun.com/2012.09.05/
2002 월드컵 역풍?

프로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프로의 근간은 아마추어다. 프로의 수준이 한순간에 좋아졌다기 보다는, 아마추어 야구가 도태됐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고교야구의 질적 저하는 서서히, 보이지 않게 진행됐다. 지난 2006년과 2008년에는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겉으로만 봐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현장 스카우트들 중 일부는 이를 두고, '2002년 월드컵 효과'라고 말하기도 한다. 국내에서 처음 열린 월드컵에서 이룬 4강의 기적에 운동신경이 뛰어난 어린이들이 야구 대신 대거 축구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지만, 2000년대 말부터 '괴물 신인'이 사라진 현실에 비춰보면 타이밍상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같은 맥락에서 야구 붐이 다시 일게 된 계기인 2008년 베이징올림픽, 2009년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세대가 입단할 4~5년 뒤에 좋은 선수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란 전망도 있다.


6일 서울 양천구 목동야구장에서 제25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결선라운드 한국과 일본의 경기가 열렸다. 선발 등판한 심재민이 6회 갑작스러운 제구력 난조를 보이며 4실점 했다.이정훈 감독이 6회 마운드에 올라 심재민을 진정시켰지만 일본의 기세를 꺽기엔 역부족이었다.
목동=송정헌 기자 songs@sportschosun.com/2012.9.6
겉멋만 든 선수들, 저변 해치는 주말리그

이외에도 문제는 많다. 많은 야구인들은 선수들이 '겉멋'부터 들었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프로야구가 인기를 누리면서 아직 실력도 되지 않는데 멋있고 화려한 플레이만 흉내낸다는 것이다.

최근 고교야구 대회를 보면, 해도 나지 않는데 모자 위에 고가의 선글라스를 하나씩 올려두고 플레이하는 선수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기본기를 갈고 닦기 위해 노력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멋 내는 법'부터 배운다는 것이다.

현재 고교야구 인기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모두의 눈은 프로로 향해 있다. 과거처럼 호쾌한 홈런이 자주 나오는 것도 아닌데, 어설프게 이기기 위한 야구만을 하는 고교야구 현장을 찾을 리 없다. 학부모들만 텅빈 관중석에서 목 놓아 아들의 이름을 외칠 뿐이다.

도입 2년째를 맞은 주말리그 역시 여러 책임에서 비켜갈 수 없다. 이번 대회 부진으로 선수들이 단기전을 치를 능력과 체력이 부족하다는 게 증명됐다. 일주일에 한 번만 경기를 치르면 되는데 굳이 많은 선수들을 키울 필요가 없어졌다. 주전 라인업에 끼지 못하는 선수들은 출전 기회를 잃었다. 한 쪽에서는 '저변 확대'를 외치고 있지만, 정작 고교야구 현장에서는 선수단 규모를 축소하기 바쁘다.

엘리트 체육에 교육을 접목시키겠다는 좋은 취지가 있지만, 취지대로 운영되는지도 의문이다. 이미 공부와 담을 쌓고 살아온 선수들이 갑자기 정규수업을 소화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제대로 공부를 시키려 했다면 초등학교, 중학교부터 서서히 바꿔가야 했다. 하지만 협회와 교과부는 제일 눈에 띄는 고등학생들에게 변화를 강요했다. '전시행정'이 선수들을 망친 꼴이다.


이명노 기자 nirvana@sportschosun.com


6일 서울 양천구 목동야구장에서 제25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결선라운드 한국과 일본의 경기가 열렸다. 경기 전 선수들이 태극기를 바라보며 애국가를 제창하고 있다.
목동=송정헌 기자 songs@sportschosun.com/2012.9.6

:) 당신이 좋아할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