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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규처럼'하면 박찬호를 공략할 수 있다.
'이용규처럼' 커트하라
이용규의 별명은 '커트의 달인'이다. 지난해 규정타석을 채운 8개구단 타자 가운데 가장 높은 4.3의 타석당 투구수(P/PA)를 기록하며 이를 증명했다. 2010년 8월29일 광주 넥센전에서는 상대투수 박준수와 20구까지 가는 접전을 펼쳐 한타석 최다투구수 기록을 세운 적도 있다. 타석에서 끈임없이 좋은 공을 걷어내면서 상대투수를 지치게 하는 게 트레이드 마크다.
문제는 박찬호가 40대에 접어든 상태라는 데 있다. 20대의 젊은 투수들도 이용규의 '커트신공'에 한번 휘말리면 크게 흔들리는데, 체력이 그들보다 떨어지는 박찬호가 느끼는 여파는 훨씬 컸다. 게다가 지난 2차례의 등판을 통해 박찬호의 한계투구수는 80개 후반에서 90개 초반이라는 점이 이미 나타난 상황. 결국 체력과 투구수가 한정된 상황에서 이용규 한 명에게만 무려 19개의 공을 던지다보니 이닝과 투구수 관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박찬호가 승리투수 요건을 눈 앞에 두고도, 5회를 스스로 끝내지 못한 것은 투구수가 이미 96개로 꽉 찼기 때문이다. 이용규의 커트에 당한 결과였다.
'이용규처럼' 승부를 주도하라
하지만 '커트'라는 기술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엄청난 집중력과 선구안 그리고 배트 콘트롤 능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박찬호를 만나는 모든 타자들이 이용규와 똑같이 커트를 해내기는 힘들다.
때문에 이용규의 박찬호 공략법에 담긴 세부기술(커트)이 아닌 근본 원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록 커트라는 형태로 나타났지만, 이용규는 박찬호를 상대하면서 매 타석 주도적으로 승부를 이끌어갔다. 이전까지 박찬호를 상대한 두산, LG 타자들에게 부족했던 것이 바로 이 승부를 주도해가는 측면이었다.
앞서 두 차례의 비교적 성공적인 선발 등판에서 박찬호는 늘 마운드에서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다. 포수로부터 공을 넘겨받아 투구할 때까지의 호흡은 무척 빨랐고, 그 과정도 매우 간결했다. '메이저리그 124승' 투수의 관록과 위용을 높은 마운드 위에서 뿜어내며 마치 '칠 테면 쳐보라'는 듯 시원시원하게 공을 뿌려댔다. 두산, LG타자들은 지레 박찬호의 위압감에 눌리고 말았다. 승부의 주도권은 늘 박찬호 쪽으로 쏠려있었다. 박찬호의 계획과 의도대로 타자들이 이끌려간 것이다.
하지만 이용규는 달랐다. 자신만의 스트라이크존을 철저히 설정해둔 상태에서 박찬호의 투구를 기다렸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까다로운 공이 오면 걷어내고, 유인구에 속지 않았다. 그러다 원하는 코스의 공이 들어오면 적극적인 스윙을 했다.
2회 두 번째 타석의 초구와 4구, 4회 세 번째 타석의 5구와 7구에 박찬호는 이용규의 몸쪽으로 슬라이더와 포심패스트볼을 승부구로 던졌다. 몸쪽으로 파고드는 슬라이더와 포심은 박찬호의 좌타자 상대비책이다. 두산과 LG타자들은 여기에 말렸다. 그러나 이용규는 이 공들을 모조리 커트해내며 박찬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결국 자신의 결정구가 막히자 박찬호에게 남은 총알이 없었다. 이렇게 승부를 자신의 의도대로 이끈 덕분에 이용규는 2회 1타점 좌전안타와 4회 볼넷을 기록할 수 있었다.
광주=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