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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희는 학창 시절을 통틀어 두 차례 수술을 받았다. 모두 선수 생명이 걸려있는 큰 수술이었다. 첫번째 시련은 중학교 때 찾아왔다. 군산남중 3학년 때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왼 손목 뼈가 완전히 부러졌다. 손목에 철심을 박았다. 가정 형편이 넉넉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수술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야구만 바라보고 살아온 아들에게 절망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야구 명문 군산상고에 입학했다.
첫 수술을 받은지 1년여가 지났을까. 손목에 들어있던 쇠뭉치를 제거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하지만 철심을 빼고 나니 왼쪽 손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한 희는 당시 상황에 대해 "공을 던지는 손이 아니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글러브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더이상 야수로 뛸 수가 없었다.
수술 뒤가 더 문제였다. 체계적인 재활을 위해서는 잠실에 위치한 재활센터를 다녀야만 했다. 다행히 어머니의 지인이 있는 구로구 개봉동에 머물 수 있었다. 하지만 서울은 그에게 한없이 낯설기만 했다. 그는 "당시 재활보다 더 힘들었던 건 낯선 환경이었다. 개봉동에서 잠실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1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차라리 재활하는 시간이 더 나았다"고 고백했다.
한 희는 어머니에게 투정부리듯 '힘들다'는 말을 하게 됐다. 놀란 어머니는 곧바로 서울로 상경했다. 잠실과 가까운 곳에 사는 친척을 수소문해 건국대 쪽에 머물 곳을 구했다. 재활센터까지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한 희는 "어머니가 오신 다음에 먹는 것부터 자는 것까지 모든 게 편해졌다. 고3 때 공을 못 던져서 유급을 해야만 했지만, 당시 재활이 잘 되어 프로에 올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 희는 수술과 재활로 3학년을 통째로 쉬어야만 했다. 유급 뒤엔 이를 악물고 공을 던졌다. 화물차를 몰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아버지와 재활 기간 내내 자신만 바라봤던 어머니께 효도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결국 그는 200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 1라운드 전체 4순위로 LG에 지명됐다. 1라운드 지명자답게 1억5000만원이라는 거액의 계약금까지 받았다. 한 희는 "당시 받은 계약금으로 아버지 차부터 사드렸다"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화물차만 모시던 아버지께 번듯한 대형 세단을 선물한 것. 나머지 계약금도 고스란히 부모님께 드렸다.
한 희는 얼마 전 기자와의 인터뷰 도중 고향 군산에서 잘 던지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한 적이 있다. 이런 그를 보기 위해 지난 16일 한 희의 부모님은 모처럼 짬을 내서 잠실구장을 찾았다. 하지만 이날 경기는 비로 취소됐다. 한 희는 "부모님께 공 던지는 모습을 못 보여드려서 아쉬웠다. 하지만 부모님과 밥도 먹고, 백화점도 가서 오히려 좋았다"며 싱글벙글 웃었다.
이명노 기자 nirvan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