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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나간 팬심은 결코 김성근 감독에게 도움될 수 없다.
프로야구를 놓고 '한편의 드라마'란 표현이 자주 쓰인다. 드라마는 '극(劇)'이다. 이런 해석이 있다. '극(劇)'이란 글자를 해체하면, 호랑이(虎)와 돼지(豚)가 칼(刀)을 들고 싸우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극(劇)은, 드라마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갈등 구조를 기반으로 한다. 인기있는 드라마일수록 그 안에는 치열한 갈등과 대립 구도가 자리잡고 있다.
SK는 두산과 더불어 최근 5년간 한국프로야구를 한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공로자다. 더 빠르고, 더 치밀한 야구가 정착됐다. 베이징올림픽 금메달과 2회 WBC 준우승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기술적인 부분 외에 또다른 김성근 감독의 공로를 언급하고 싶다. 김성근 감독은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점차 연성화돼가는 프로야구판에서 김 감독은 날선 코멘트를 감추지 않았다. 다른 팀에 대해 주저없이 논평했다. 물론 당사자들은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악역' 김성근 감독이 필요하다
게다가 1%의 실패 가능성마저 없애기 위해, 김 감독은 7점차로 앞선 9회 2사후에 투수를 교체하는 강수를 흔하게 보였다. 상대팀 감독들은 "정말이지 약올라서, SK 만큼은 어떻게든 이기고 싶다"는 목소리를 냈다. 갈등이다.
'억울하고 기분 나쁘면 경기에서 이겨라! 김성근식 야구를 욕하려면 일단 이기고 봐야할 것 아닌가.'
지난해 중반 이후 이같은 의식이 강화됐다. 성적 좋은 팀은 본래 '공공의 적'이 된다. 최근 몇년간 프로야구는 'SK vs 반 SK 진영'의 분위기를 보인 게 사실이다. 결국엔 모든 팀들이 SK를 잡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올해 하위팀들도 SK와 경기할 때면 내일이 없는 듯 전력을 쏟아붓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어차피 SK를 꺾지 못하면 우승도, 4강도, 탈꼴찌도 불가능하니까.
프로야구는 컨텐츠고 그 안에는 스토리가 필요하다. 모범생만 등장하는 드라마는 재미 없다. 매력적인 '악역'이 극을 풍성하게 만든다. 김성근 감독은 거침없는 야구 스타일과 날선 발언으로 이같은 역할을 맡아왔다. 기술적인 진보와 함께, 흥미로운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주연급 '악역'이었던 셈이다.
김성근 감독이 다시 프로야구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팬들이 많을 것이다. 언제 어느 팀이 될 지 알 수 없지만, 오로지 야구만을 바라보는 김 감독이 돌아와 또다른 드라마를 써줬으면 한다.
빗나간 팬심, 돕는 게 아니다
18일 문학구장에서 성난 야구팬들이 그라운드로 몰려내려왔을 때만 해도 그럴 수 있다고 봤다. 순수한 열정이라는 믿음이었다. 마운드 위에서 유니폼을 불태우며 시위했다. 여기까지도 이해한다 치자.
극히 일부겠지만, 그중 몇몇은 처음 의도와는 다른듯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덕아웃으로 들어가 배팅훈련용 공을 포함해 장비를 꺼내왔고, 공이 바닥에 흩어지자 그걸 줍기 위해 우르르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덕아웃 근처의 음료수를 당연하다는듯 집어 마시기 시작했다.
이날 부산 원정을 떠나야했던 SK 선수단은 라커룸 안에서 대기하다가 결국엔 개별적으로 KTX 광명역까지 이동해야 했다. 이날 문학구장 본부석쪽 2층에선 경찰들이 무전기를 들고 사태를 주시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날 선수단버스의 앞 유리창이 망가졌다. 덕아웃 의자, 1루측 1층 복도 도색 훼손, 베이스, 포토존 파손 등 모든 손실을 합치면 약 2800만~3000만원 정도라고 한다.
좋아했던 감독을 잃은 분노를 시위로 내보이는 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진심이 건전하지 못한 형태로 표출되는 건 결코 김성근 감독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훗날 김성근 감독을 영입하고픈 마음이 있는 구단들마저 부담을 느끼게 될 것이다.
결국 열성팬이 오히려 김성근 감독의 프로야구 컴백을 막게 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김성근 감독도 이런 광경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분하게 늘 응원하며 잊지 않는 것. 그게 필요하지 않을까.
김남형 기자 star@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