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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심장', 아주 오래 전부터 아버지의 휴대폰에 딸의 이름은 그렇게 저장돼 있었다. 나이 마흔에 본 외동딸의 첫 탁구라켓 케이스에도 아버지는 '나의 심장', 한줄을 새겼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관중석에서 딸의 경기를 몰래 지켜봤다. '세계 챔피언' 아버지도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때론 어린 딸을 붙잡고 폭풍 잔소리도 했지만 '호랑이 감독' 아버지는 딸에게 유독 약했다. 자신을 닮아 승부욕 강하고, 똑 부러진 딸이 사춘기 중학생이 되자 전담코치를 뒀고, '거리두기'를 했다.
# 열여섯 살이 된 '나의 심장'이 지난해 11월 세계청소년탁구선수권 여자 U-19 단체전에서 만리장성 중국을 넘어 사상 첫 금메달 역사를 쓰던 날, 아버지는 밤잠을 설쳤다. 열여덟에 중국을 돌려세우고 서울아시안게임 금메달, 스무살에 서울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아버지는 "이제 시작"이라며 애써 표정을 감췄다. 을사년 새해 인터뷰 요청, 아버지는 만사를 제치고 딸의 훈련장이 있는 화성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딸바보도 이런 딸바보가 없다. 이어진 사진 촬영, 아버지의 애정 표현에 사춘기 딸은 "아빠, 좀!"하며 밀쳐냈지만 '나의 심장'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선 꿀이 뚝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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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유명선수 출신이라 부담되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부담 안 느끼려고 해요"라고 했다. 아빠의 잔소리를 싫어하는 줄만 알았는데 새해 메시지에 "도움을 많이" 부탁했다. "아빠가 주말에 가르쳐주셔서 정말 좋아요. 탁구한 지 9년 됐는데 이젠 아빠 잔소리도 취사선택하는 노하우가 생겼어요. 다 들으려면 머리 아프니까 최대한 도움 받을 것만 받으려고요." '꾀돌이' 마인드도 부전여전이다. 유 감독은 "예린이가 달라졌다. 작년 하반기부터 스스로 찾아서 훈련한다. '그만하라' 할 때까지 한다. 주말마다 훈련하자고 한다. 첨엔 너무 좋았는데 내가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다"며 자랑 섞인 푸념을 늘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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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감독은 "예린이는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다. 승패에 연연하는 예린이에게 '자신을 믿어라' '이기고 지고를 떠나서 발전 있는 탁구를 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이 나이에 한 게임 이기려고 소심하게 치는 건 아무 발전이 없다. 결국 중국을 이기는 탁구를 해야 한다. 자신을 이기면 중국도 이긴다"고 말했다. "예린이는 아직 승패의 부담감이 크다. '지면 어쩌지' 걱정한다. 걱정 대신 '지면 어때? ''누가 뭐라 하든 공격적으로, 내 탁구를 한다'는 위닝멘탈리티와 파이팅을 더 채웠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런 아빠의 마음을 알고 있을까. 유예린은 "아빠가 제가 잘할 때 티를 안내세요. 너무 좋아하면 부담 느낄까봐 그런 것같아요. 크게 칭찬도 안하고 다음 경기 준비하라고 하죠, 그래도 아빠가 얼마나 좋아하시는진 알아요. 톡을 엄청 보내시거든요, 어떨 땐 '그만 보내'라고도 해요. 아빠도 저도 솔직한 성격이라서… 그래도 다음날 또 보내세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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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린의 새해 목표는 "경기 때 후회가 없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꽉 채우는 것", 새해 소망은 "국가대표, 시니어대회 단식 우승!"이다. "열심히 해서 2028년 LA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싶어요"라며 눈을 반짝였다. 탁구 외 새해 소망을 묻자 유예린의 시선은 '가족'을 향했다. "아빠 엄마한테 잘하기, 짜증 덜 내기. 가족에게 잘하고 싶다"는 유예린은 진심을 전했다. "아빠, 주말에도 제가 필요로 하면 열심히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도 힘들더라도 조금 더 참고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유 감독은 "쉴 시간이 너무 없다"면서도 "앞으로 1~2년이 중요하다. 예린이는 도전정신이 있다. 시니어 대회도 나가고 싶어하고, 쑨잉샤와도 붙어보고 싶다고 한다. 딸을 위해, 한국 탁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유예린이 제일 좋아하는 4인조 밴드 '데이식스'의 노래처럼 '지고는 못사는, 연습벌레' 탁구 부녀의 분투가 대한민국 탁구사의 '한 페이지가 될' 그날을 기다린다.
화성=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