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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 가봤어요? 저 천지에 손 담근 여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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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감독은 "우리는 평양에서 14호차로 통했다"며 웃었다. 현 감독을 비롯한 특별수행원들은 18일 고려호텔에 여장을 푼 이후 줄곧 14호차를 타고 2박3일간 동행했다. "주로 김정숙 영부인의 일정을 수행했다. 북한의 문화 공연, 교육 현장들을 많이 봤다"고 했다. 14호차에는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스포츠계, 문화계, 연예계 스타, 인사들이 동승했다. 현 감독을 비롯해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차범근 전 국가대표감독, 평창올림픽 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 박종아, 유홍준 교수, 안도현 시인, 지코, 에일리, 알리, 최현우 등이 함께했다. 첫날, 옥류아동병원, 김원균음악종합대학, 평양대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했다. 둘째날, 만경대 학생소년궁전, 교원대학교, 만수대를 돌아본 후, 5·1경기장에서 집단체조극을 관람했다.
첫날 김정은 위원장이 주관한 목란관 만찬장 뒷얘기는 유쾌했다. 현 감독은 "목란관 만찬은 분위기가 정말 흥겹고 너무나도 좋았다"고 떠올렸다. "지코가 '아티스트'라는 본인의 신곡을 불렀다. 랩이 많은 노래라 북측으로서는 낯설 수도 있는 곡이었는데 남측 팬들이 적극 호응했다. 에일리는 드라마 '도깨비'의 '첫눈 처럼 너에게 가겠다'를 불렀다. 작곡가 김형석씨는 알리와 '아리랑'을 멋드러지게 편곡해 불렀다. 김형석씨가 성악을 전공하신 김정숙 영부인을 지목하자 영부인께서도 '동무생각'으로 화답하셨다. 김형석씨가 리설주 여사께 답가도 요청했는데 손사래 치셨다.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과 현송월 북한 삼지연악단 단장은 노사연의 '만남'을 열창하기도 했다. 다음날 14호차에서 김형석씨가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랬지'라고 해서 모두 웃었다. 그만큼 만찬장 분위기가 좋았다."
리설주 여사는 현 감독과의 첫 만남에서 "손 좀 한 번 잡아봅시다. 우리 여성들이 남북관계에 앞장서고 있습니다"라며 반가움을 표했다. 리 여사의 첫인상을 묻자 현 감독은 "선이 곱고 차분하고 참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 영부인을 정말 잘 보필하시더라. 김정은 위원장도 현명하게 잘 보필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리분희 못만났어요?"
현 감독은 1991년 일본 지바세계탁구선수권 남북 단일팀의 금메달 후 1993년 예테보리 대회에서 '북한 파트너' 리분희와 재회했다. 이후 25년간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북한에 가족 하나 두고 온 것 같은 마음"이라고 했었다. 이번 방북을 앞두고 "중요한 나랏일을 수행하러 가는데 개인적 만남에 대해선 기대하지 않는다. 마음을 비웠다"고 했던 그녀의 예감대로 이번에도 리분희를 만나지 못했다. 아니 아쉽게 만남의 기회를 놓쳤다.
첫날 리분희와 현 감독은 지척에 있었다. 현 감독은 직접 그날의 상황을 전했다. "첫날 3시에 출발하는 일정이 1시 반으로 당겨졌다. 나중에 몇몇 고위인사들이 '리분희 못 만났느냐'고 물어보시길래 의아했는데 나중에 14호차 안내원이 말해주더라. 리분희가 그 시간에 호텔쪽으로 왔었다고 하더라." 현 감독은 "중요한 것은 남북 정상회담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나로 인해 일정이나 시선이 흐트러지는 걸 원치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힘주어 말했다. "2020년에 부산세계선수권때 정식으로 분희언니를 초청하면 된다. 그때는 탁구대회니까 못만날 이유가 없다. 2021년이면 일본 지바 단일팀 30주년이 된다. 그때도 만날 수 있다. 꼭 만날 수 있다."
백두산, 천지에 손 담그다
북한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억을 묻는 질문에 현 감독은 "나, 천지에 손 담근 여자"라며 활짝 웃었다. 백두산 천지행은 둘째날 저녁에야 통보됐다. 남측으로부터 방한복이 공수됐다. 이튿날 아침에 서울로 갈 줄 알았던 이들은 적이 놀랐다. 이튿날 스케줄이 잡혀 있는 14호차 대세 연예인들은 당황스러워했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일 스케줄 어떡하지' 하더니 '다들 그래도 천지인데, 한국에 늦게 가더라도 무조건 가자'고들 했다."
현 감독은 새벽 3시부터 일어나 잠을 설쳤다. 새벽 4시40분 집결해 새벽 5시에 삼지연비행장을 향해 출발했다. 백두산 정상에서 직접 만난 천지는 황홀했다. "날씨가 정말 기가 막혔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만날 수 있는 날씨라고들 했다. 지급받은 방한복을 벗어도 될 만큼 온화한 날씨였다"고 떠올렸다. "천지로 가는 케이블카가 있다. 엄청 높다. 7분을 타고 내려간다. 현장에서도 시간이 부족해 40명 밖에 못 갔다"고 했다. "천지가 너무너무 맑더라. 손을 담근 내 그림자가 천지에 그대로 비쳤다"며 그날의 감격을 전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30주년을 맞는 올해 현 감독은 "정말 좋은 일이 많다"며 미소 지었다. 북한에 다녀온 후 마음이 더 바빠졌다. 해야할 일이 많다. "북한의 학생궁전, 음악대학에 가서 느낀 바가 컸다. 어릴 때부터 재능과 집중력을 키워주는 체계적인 교육방식은 인상적이었다. 우리 민족의 우수성, 오롯한 정신력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런 좋은 것들을 스스로 버리고 있다. 학생궁전에서 본 '고상한 인성과 완강한 집중력을 기르는 곳'이라는 표어가 기억에 남는다. 그런 걸 보면서 체육인으로서 초심을 생각했다. 우리는 무얼 하고 있는지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기본에 충실한 탁구영재학교를 만들어, 지속적인 남북 교류를 하고 싶다. 정신력, 인성부터 가르치고, 목표의식을 심어준 후에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는 소신을 표했다. "14호차 멤버들과 정례적인 만남을 이어가기로 했다. 남북평화를 위해 탁구와 스포츠를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우리는 무엇이든 함께 할 것"이라며 눈을 빛냈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