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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뚝이'가 마침내 꿈을 이뤘다. 오직 '신'만이 안다는 올림픽 시상식대 맨 꼭대기에 섰다. 한국 선수단의 첫 금메달이자 4년 전 '노메달' 굴욕을 겪은 남자 쇼트트랙의 부활을 알린 금메달이었다.
종목 전향밖에 답이 없었다. 그 때 선택한 것이 '쇼트트랙'이었다. 워낙 운동신경이 출중했던 터라 천재성을 발휘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빙상부에 들어간 그는 4학년 때부터 6학년 형들을 제치고 종별선수권대회 정상에 섰다. 빙상계에선 '슈퍼 유망주'의 탄생에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불운은 대구 경신중 때부터 시작됐다. 중1 때 오른쪽 정강이뼈가 부러졌다. 첫 부상이었다. 1년6개월 동안 스케이트화를 신지 못했다. 어린 마음에 운동을 그만두려 했다. 그러나 임효준은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고향 대구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자신의 능력을 일찍이 눈 여겨 본 코치와 원룸에서 2년간 같이 지내며 재기를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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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승장구할 줄 알았다. 그러나 불운은 끝이 아니었다. 두 번째 부상이 동북고 2학년 때 찾아왔다. 오른발목이 골절됐다. 다행히 6개월 만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번엔 오른발목 인대가 끊어졌다. 부상의 악령은 계속해서 임효준을 괴롭혔다. 재활을 거쳐 참가한 대회에서 허리와 손목이 부러졌다. 앞서 넘어진 선수에게 걸려 얼음 위에 넘어졌다. 선수 생명을 마감할 수도 있었던 중상이었다. 그렇게 칼을 댄 수술만 7차례나 했다.
특히 2년 전 허리 골절은 최대 위기였다. '쇼트트랙을 하다가 죽겠다'는 생각도 했다. 한국체육대학교 동료들도 "형은 이거 하다가 죽겠다"라며 걱정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임효준은 "그 동안 힘든 순간이 많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라며 "그러나 주변에서 실력을 의심하지 말라는 말이 큰 힘이 됐다"고 밝혔다. 이어 "그 말을 항상 머리에 새기고 운동을 했다.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를 오뚝이처럼 일으켜 세운 건 '평창올림픽'이었다. 임효준은 "평창 하나 보고 이겨냈다"고 했다. 또 "부상 때문에 고생하는 선수들에게 꿈을 바라보며 끝까지 달려가면 좋은 결과가 반드시 찾아온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지난해 4월 임효준은 심리치료까지 받으며 출전한 평창동계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당당히 1위를 기록했다. 아들도 울고, 현장에서 지켜보던 어머니(곽다연씨)도 펑펑 울었다.
하지만 줄곧 그를 괴롭히던 부상 악령이 또 다시 엄습했다. 지난해 9월 월드컵 1차 대회 1000m 결선에서 결승선을 통과하다 상대 선수와 부딪혀 얼음 위에 넘어진 뒤 요추부염좌(허리가 뒤틀리며 염증이 발생) 진단을 받아 2~3차 대회에 결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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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절실함으로 똘똘 뭉친 임효준을 주저앉힐 수 없었다. 김선태 쇼트트랙대표팀 감독은 "효준이의 장점은 누구보다 절실하다는 것"이라며 역경 스토리를 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롤모델' 빅토르 안(안현수)과 올림픽에서 경쟁하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했다.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꿈이기도 했다. 임효준은 지난달에도 빅토르 안이 국내로 전지훈련을 왔을 때 한체대에서 함께 훈련하기도 했다. 임효준은 "현수 형이 '나도 토리노 때 그랬다'면서 내게 '너 정말 잘 할 수 있다'고 격려하고 조언을 해 주셨다"면서 "현수 형은 롤모델이자 좋아하는 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도 후배들에게 그런 선배가 되고 싶고, 그렇게 되려고 정말 노력하고 있다"며 웃었다.
대망의 올림픽, 그는 춘추전국시대로 평가받는 15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숱한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한 끝에 꿈을 이뤄낸 '오뚝이' 임효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아직 그의 올림픽은 끝나지 않았다. '임효준 전성시대'의 첫 발을 내밀었을 뿐이다.
강릉=김진회 기자 manu35@sportschosun.com